한바탕 비를 쏟아내고 나서는, 낮의 뜨거운 볕 사이로 선선한 바람결이 목덜미 위 땀을 식히며 지나갑니다. 어느덧 가을의 삼분지 이에 들어서네요(백로, 白露, 9월 7일). 단풍이 들고 하늘이 높아지면, 마음도 한 끗 넉넉해질까 기대를 해봅니다. 책 한 권 골라 집어 들고, 느긋한 걸음으로 구월을 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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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괴테 할머니’가 있습니다. 독일 바이마르도 아닌 여주에,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한갓진 시골 한켠에 ‘괴테 마을’이 있습니다. 직접 나무를 심고, 꽃과 풀을 가꿔 정원을 만들고, 한옥채를 세워 한 평 남짓한 작은 방 하나 침실로 두고 나머지 집 전체를 헤아릴 수 없는 장서를 채우고, 여백서원餘白書院이라 이름 붙인 그곳에서 평생을 바쳐 온 괴테의 모든 글을 번역한 '한국어판 괴테 전집'을 갈무리하고 있는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독문학)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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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수는 2011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고 또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괴테 연구자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괴테 금메달’(독일 괴테학회)을 받았습니다. 2018년에는 학술서 ‘괴테의 서동(西東) 시집 연구서’가 바이마르 괴테학회의 77번째 총서로 나와 독일에서까지 화제가 되고, 독일 욀스니츠시에서 주는 라이너쿤체상도 받았습니다. 뿐더러, 국내 학계에 독문학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장본인으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 등 시대를 풍미한 고전들의 빼어난 번역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뜻을 가지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그렇게 큰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가를 20년째 괴테 마을을 지어오며 몸소 삶으로 기록하고 있는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또 한동안 먼지가 앉도록 방치하고 소홀했던 삶의 나침반을 다시 꺼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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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은 괜찮은지요. 아픈 걸 말할 형편이 안 돼 가지고요. 내가 다 저지른 일인데 어디다 응석을 부리겠습니까(웃음). 나름대로 건강관리는 하고 있어요. 40대 때 디스크를 심하게 앓았는데, 어느 날 허리가 너무 아파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이렇게 의식이 맑은 채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즈음 어떤 한의사가 한 말이 생각나더군요. ‘몸도 텐트라고 생각하라, 뼈에 문제가 있다고 뼈만 생각하는데 막대만 갖고는 안 된다. 줄을 잘 이어야 한다.’ 체육관 다닐 형편은 못 되고 이 악물고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했지요. 매일 내 나이만큼 윗몸 일으키기를 했더니 어느 순간 디크스가 사라졌어요. 지금도 매일 합니다.
- 정원 관리며 모든 것을 혼자 다 한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여기저기 고장 나면 고치는 게 제일 큰 걱정입니다. 사람 부르면 하루에 10만 원 20만 원이 그냥 나갑니다. 집이 덩그러니 크니까 부자 집이려니 하는데, 저는 경제적으로 돈이 일 푼도 없습니다. 땅이고 집이고 다 서원(사단법인)으로 넘겨 어디 가서 대출도 못 받아요(웃음). 근데요, 이상하게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맨손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어디다 크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든 도와주는 분들이 꼭 있어요. (앞으로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언제나 그랬어요.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반성한다는 게 제 인생관입니다. 하하하.
-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면서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평생 공부만 한 분이 노동이 힘들지 않은지요. 누가 애 길러보고 낳나요, 낳으면 기르는 거지. 머리가 아프면 밖에 나가 풀을 뽑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스톱이 안되는 게 문제예요. (글을 읽거나 쓰는) 정신적인 일은 암만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풀 뽑는 일은) 조금만 해도 확 표가 나니까 무리를 하곤 합니다. 가급적 (밖에) 안 나가려고 주의를 하는데 잘 안 됩니다.
- 어느 인터뷰에서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다’고 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서울대 교수까지 지낸 분이 그런 말을 한 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젊을 적엔 아무리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마치 벼랑 끝을 두 손가락으로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누가 새끼손가락 하나만 잡아주어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자꾸 손등이 짓밟히는 느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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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수는 1973년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해 대통령상까지 받았지만 독일 유학과 박사과정 진학에서 늘 남자들에게 밀렸다고 합니다. ‘여자가 독일문학을 공부해 봐야 할 것이 없다’ 는 말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석사과정을 졸업했을 때에는 결혼과 남매 출산으로 공부의 길이 더 멀어졌습니다. 어렵사리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갓난아이 때문에 3학기 만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읽기와 쓰기를 놓지 않았습니다. 혼자 수많은 독일어 원서를 읽고 번역하면서 대학 졸업 10년 만에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적이 없이 떠돌다 막 개교한 한 사립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으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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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안식년도 없이 1주일에 22시간씩 강의를 했어요.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쳐서 나도 크고 학생들도 크고 학교도 컸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서울대로 오라고 해서 가게 된 거지요. 출입국 도장 찍힌 여권이 네 권입니다. 세계 어디든 좋은 강의가 있다고 하면 남아메리카건 아프리카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겠다는 심정으로 달려갔어요. 그런 식으로 제 정신 아니게 살았습니다. 젊어서는 가진 꿈이라는 게 ‘그냥 사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였습니다.
- 그냥 사는 거라면…. 무슨 수를 쓰지 않고도 그냥 살아도 되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뜻이에요. 세상이 무슨 수를 써야 살아야 하는 것 같았거든요. 계산도 하고 남을 밀쳐도 내야 하고. 그런 거 안 해도, 밀려나도 살아질 수 있는 거. 나처럼 바보같이 살아도 죽지 않고 살아지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사는 데 물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디다. 자식도 오로지 내 자식만 돌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스님은 아니지만 요즘 중생들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조금 한 걸음만 떨어져 보았으면 좋겠는데…아직 오지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과거 어느 시점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사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갑니까.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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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백서원의 모태는 퇴임 훨씬 전 한창 일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만들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개집 크기라도 좋으니 소반 놓고 앉아서 글만 쓸 수 있는 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학교 연구실은 늘 학생들이 찾아오고 집에 제 방을 갖기까지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20여 년 전에 누군가가 여기 건너편 마을에 헌 집을 찾아줘서 그때부터 여주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폐가인 데다 등기가 안 되는 집이다 보니 늘 집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했지요. 그러던 차에 바로 옆 동네에 땅이 나왔다고 해서 몇 평인지도 모르고 덜컥 계약을 해버렸어요. 그 빚 갚느라고 10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낙성대에 있던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여기서 출퇴근을 했어요. 제 스타일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애들처럼 딴 게 안 보이는 사람입니다. ‘유턴’이 안 돼요(웃음). 그러다 이렇게 큰 땅을 나 혼자 쓸 수는 없어 나처럼 뭔가가 절실한 사람들과 나누어 쓰려고 서원을 짓게 된 겁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발이 묶였지만 그동안 국내외에서 많은 분이 다녀가셨어요. 이탈리아 시인, 폴란드 교수 등 직업도 다양했습니다. 베를린 벽화가 한 분은 여기 방과후학교 어린이들 숙소에 벽화를 그려줘 도시의 명물을 만들어주었고, 쾰른의 화가 한 분은 두 달 동안 102점이나 되는 수채화를 그려서 전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온 장애 자녀를 둔 가족이 화가와 인연이 돼 자녀가 화가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가족은 서원의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가기도 했어요.
- 어떻게 괴테를 파고들게 됐나요. 그건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깊게 들어가다 보면 최고와 만나지 않습니까. 독문학의 종착이 된 거지요. 철학에서 니체나 헤겔을 빼놓을 수 없듯, 괴테를 중심으로 한 독일 문학은 세계문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지요. 괴테는 문인이기도 했지만 독일 바이마르 공국 재상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고, 식물학·광학까지 깊이 연구한 과학자였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불태워 쏟는 사람들의 경우 특유의 편향성이나 괴짜 성향이 나올 수도 있는데, 괴테는 특이하게도 매우 원만하면서 포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새벽 5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구술을 통해 글을 쓰고 오후에는 사람들을 불러 정치를 하고 저녁에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렇게 밀도 있게 살았으니 그렇게 업적이 쌓일 수밖에 없었지요. 정말 큰 인물이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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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괴테의 가장 큰 매력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에 모든 것을 쏟는 집중력이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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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부모로부터 좋은 재능을 받았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지요. 아버지로부터는 준수한 외모와 인생을 견실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어머니로부터는 명랑한 본성과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저는 괴테의 삶을 보면서 이 사람의 위기 극복 능력이 참으로 독보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대표적인데요,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도저히 안 되는 사랑을 한 거잖아요. 괴테는 4주일간 미친 듯 작품을 쓰고 주인공을 죽이고는 자기 스스로는 그 문제를 넘어섭니다. 그는 쓰는 행위를 통해 삶에서 맞닥뜨린 문제가 뭔지를 파악했어요. 사실 문제가 뭔지 알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괴테처럼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작가를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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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그저 무얼 좀 배우고 싶었고, 그냥 무슨 수 쓰지 않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가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지더라고요.
그리고 제 경험상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집니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합니다. 내가 거쳐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요헨 골츠 회장님이 괴테의 이런 말을 한국 젊은이들을 위해 전했어요.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이라고요. '시간' 하면 쫓긴다는 생각부터 하는데, 정말 엄청난 정의를 내린 거죠. 순간순간 이 찰나야말로 진정한 나의 소유죠. 그러니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합니까.
젊은이들이 부동산, 주식 폭등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어떤 상황에서든 시간이라는 이 엄청난 재산을 마음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살 수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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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호(號)를 빌려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 집'이라는 의미를 담은 여백 서원에서, 전 교수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찾아오는 손님도 맞습니다. ‘오마토’와 ‘시마토’라고 해서 5월과 10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학교 수업으로 인연 맺은 제자들과 정례 모임도 가집니다. 누구든지 참여해 책을 읽고, 밥도 해 먹고, 각자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삶을 다시 생각합니다. 괴테 마을, 젊은 괴테의 집 1층에는 지관서가가 자리해 있습니다. 이 가을 어느 쉬는 날, 느긋한 발걸음과 맑은 마음으로 선생이 삶으로 기록한 이 마을에 들러 여백의 시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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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작품은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베토벤, 바그너, 멘델스존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에 곡을 붙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란츠 슈베르트는 특히 괴테의 언어에 큰 영감을 받아 ‘마왕(Erlkönig)’, ‘들장미(Heidenröslein)’, ‘방랑자의 밤노래(Wandrers Nachtlied)’ 등 대표적인 가곡들을 남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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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Wandrers Nachtlied (방랑자의 밤노래) II (1780)
Über allen Gipfeln Ist Ruh, In allen Wipfeln Spürest du Kaum einen Hauch; Die Vögelein schweigen im Walde. Warte nur, balde Ruhest du auch.
모든 산봉우리 위엔 고요, 모든 숲의 나뭇가지에도 아득한 숨결조차 느낄 수 없네. 작은 새들마저 숲 속에 고요히 잠들었구나. 잠시만 기다리라, 곧 너 또한 쉬게 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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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는 이 시에 두 번 곡을 붙였는데, 그중 1823년에 작곡한 두 번째 버전 D.768(1823)이 독일 가곡(Lied)의 정수로 꼽히며 널리 불립니다. 인생의 방황과 고단함을 지나 마지막 쉼을 그리는 괴테 시, 슈베르트 곡, 방랑자의 밤노래를 세계적 베이스 연광철의 해석으로 들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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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Wandrers Nachtlied II, Op. 96 No. 3, D. 768 'Über allen Gipfeln ist Ruh' '방랑자의 밤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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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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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止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7길 32 SK관훈빌딩 11층 수신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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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비를 쏟아내고 나서는, 낮의 뜨거운 볕 사이로 선선한 바람결이 목덜미 위 땀을 식히며 지나갑니다. 어느덧 가을의 삼분지 이에 들어서네요(백로, 白露, 9월 7일). 단풍이 들고 하늘이 높아지면, 마음도 한 끗 넉넉해질까 기대를 해봅니다. 책 한 권 골라 집어 들고, 느긋한 걸음으로 구월을 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괴테 할머니’가 있습니다. 독일 바이마르도 아닌 여주에,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한갓진 시골 한켠에 ‘괴테 마을’이 있습니다. 직접 나무를 심고, 꽃과 풀을 가꿔 정원을 만들고, 한옥채를 세워 한 평 남짓한 작은 방 하나 침실로 두고 나머지 집 전체를 헤아릴 수 없는 장서를 채우고, 여백서원餘白書院이라 이름 붙인 그곳에서 평생을 바쳐 온 괴테의 모든 글을 번역한 '한국어판 괴테 전집'을 갈무리하고 있는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독문학) 이야기입니다.
전 교수는 2011년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고 또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괴테 연구자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괴테 금메달’(독일 괴테학회)을 받았습니다. 2018년에는 학술서 ‘괴테의 서동(西東) 시집 연구서’가 바이마르 괴테학회의 77번째 총서로 나와 독일에서까지 화제가 되고, 독일 욀스니츠시에서 주는 라이너쿤체상도 받았습니다. 뿐더러, 국내 학계에 독문학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장본인으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파울 첼란의 ‘죽음의 푸가’ 등 시대를 풍미한 고전들의 빼어난 번역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사람이 뜻을 가지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그렇게 큰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가를 20년째 괴테 마을을 지어오며 몸소 삶으로 기록하고 있는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또 한동안 먼지가 앉도록 방치하고 소홀했던 삶의 나침반을 다시 꺼내 듭니다.
- 건강은 괜찮은지요.
아픈 걸 말할 형편이 안 돼 가지고요. 내가 다 저지른 일인데 어디다 응석을 부리겠습니까(웃음). 나름대로 건강관리는 하고 있어요. 40대 때 디스크를 심하게 앓았는데, 어느 날 허리가 너무 아파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이렇게 의식이 맑은 채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즈음 어떤 한의사가 한 말이 생각나더군요. ‘몸도 텐트라고 생각하라, 뼈에 문제가 있다고 뼈만 생각하는데 막대만 갖고는 안 된다. 줄을 잘 이어야 한다.’ 체육관 다닐 형편은 못 되고 이 악물고 윗몸 일으키기를 시작했지요. 매일 내 나이만큼 윗몸 일으키기를 했더니 어느 순간 디크스가 사라졌어요. 지금도 매일 합니다.
- 정원 관리며 모든 것을 혼자 다 한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여기저기 고장 나면 고치는 게 제일 큰 걱정입니다. 사람 부르면 하루에 10만 원 20만 원이 그냥 나갑니다. 집이 덩그러니 크니까 부자 집이려니 하는데, 저는 경제적으로 돈이 일 푼도 없습니다. 땅이고 집이고 다 서원(사단법인)으로 넘겨 어디 가서 대출도 못 받아요(웃음). 근데요, 이상하게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맨손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어디다 크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든 도와주는 분들이 꼭 있어요. (앞으로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언제나 그랬어요.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반성한다는 게 제 인생관입니다. 하하하.
-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면서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평생 공부만 한 분이 노동이 힘들지 않은지요.
누가 애 길러보고 낳나요, 낳으면 기르는 거지. 머리가 아프면 밖에 나가 풀을 뽑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스톱이 안되는 게 문제예요. (글을 읽거나 쓰는) 정신적인 일은 암만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데, (풀 뽑는 일은) 조금만 해도 확 표가 나니까 무리를 하곤 합니다. 가급적 (밖에) 안 나가려고 주의를 하는데 잘 안 됩니다.
- 어느 인터뷰에서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다’고 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서울대 교수까지 지낸 분이 그런 말을 한 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공부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젊을 적엔 아무리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마치 벼랑 끝을 두 손가락으로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누가 새끼손가락 하나만 잡아주어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자꾸 손등이 짓밟히는 느낌….
전 교수는 1973년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졸업해 대통령상까지 받았지만 독일 유학과 박사과정 진학에서 늘 남자들에게 밀렸다고 합니다. ‘여자가 독일문학을 공부해 봐야 할 것이 없다’ 는 말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석사과정을 졸업했을 때에는 결혼과 남매 출산으로 공부의 길이 더 멀어졌습니다. 어렵사리 독일로 유학을 떠났지만 갓난아이 때문에 3학기 만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읽기와 쓰기를 놓지 않았습니다. 혼자 수많은 독일어 원서를 읽고 번역하면서 대학 졸업 10년 만에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적이 없이 떠돌다 막 개교한 한 사립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으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하게 됩니다.
11년 동안 안식년도 없이 1주일에 22시간씩 강의를 했어요.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쳐서 나도 크고 학생들도 크고 학교도 컸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서울대로 오라고 해서 가게 된 거지요. 출입국 도장 찍힌 여권이 네 권입니다. 세계 어디든 좋은 강의가 있다고 하면 남아메리카건 아프리카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겠다는 심정으로 달려갔어요. 그런 식으로 제 정신 아니게 살았습니다. 젊어서는 가진 꿈이라는 게 ‘그냥 사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였습니다.
- 그냥 사는 거라면….
무슨 수를 쓰지 않고도 그냥 살아도 되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뜻이에요. 세상이 무슨 수를 써야 살아야 하는 것 같았거든요. 계산도 하고 남을 밀쳐도 내야 하고. 그런 거 안 해도, 밀려나도 살아질 수 있는 거. 나처럼 바보같이 살아도 죽지 않고 살아지는 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사는 데 물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디다. 자식도 오로지 내 자식만 돌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스님은 아니지만 요즘 중생들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조금 한 걸음만 떨어져 보았으면 좋겠는데…아직 오지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과거 어느 시점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사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갑니까.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 여백서원의 모태는 퇴임 훨씬 전 한창 일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만들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개집 크기라도 좋으니 소반 놓고 앉아서 글만 쓸 수 있는 내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학교 연구실은 늘 학생들이 찾아오고 집에 제 방을 갖기까지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20여 년 전에 누군가가 여기 건너편 마을에 헌 집을 찾아줘서 그때부터 여주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폐가인 데다 등기가 안 되는 집이다 보니 늘 집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했지요. 그러던 차에 바로 옆 동네에 땅이 나왔다고 해서 몇 평인지도 모르고 덜컥 계약을 해버렸어요. 그 빚 갚느라고 10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낙성대에 있던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여기서 출퇴근을 했어요. 제 스타일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애들처럼 딴 게 안 보이는 사람입니다. ‘유턴’이 안 돼요(웃음). 그러다 이렇게 큰 땅을 나 혼자 쓸 수는 없어 나처럼 뭔가가 절실한 사람들과 나누어 쓰려고 서원을 짓게 된 겁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발이 묶였지만 그동안 국내외에서 많은 분이 다녀가셨어요. 이탈리아 시인, 폴란드 교수 등 직업도 다양했습니다. 베를린 벽화가 한 분은 여기 방과후학교 어린이들 숙소에 벽화를 그려줘 도시의 명물을 만들어주었고, 쾰른의 화가 한 분은 두 달 동안 102점이나 되는 수채화를 그려서 전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온 장애 자녀를 둔 가족이 화가와 인연이 돼 자녀가 화가의 길로 접어들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가족은 서원의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가기도 했어요.
- 어떻게 괴테를 파고들게 됐나요.
그건 간단합니다. 한 분야를 깊게 들어가다 보면 최고와 만나지 않습니까. 독문학의 종착이 된 거지요. 철학에서 니체나 헤겔을 빼놓을 수 없듯, 괴테를 중심으로 한 독일 문학은 세계문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지요. 괴테는 문인이기도 했지만 독일 바이마르 공국 재상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고, 식물학·광학까지 깊이 연구한 과학자였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불태워 쏟는 사람들의 경우 특유의 편향성이나 괴짜 성향이 나올 수도 있는데, 괴테는 특이하게도 매우 원만하면서 포용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새벽 5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구술을 통해 글을 쓰고 오후에는 사람들을 불러 정치를 하고 저녁에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렇게 밀도 있게 살았으니 그렇게 업적이 쌓일 수밖에 없었지요. 정말 큰 인물이었지요.
그는 “괴테의 가장 큰 매력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에 모든 것을 쏟는 집중력이었다”고 합니다.
괴테는 부모로부터 좋은 재능을 받았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지요. 아버지로부터는 준수한 외모와 인생을 견실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어머니로부터는 명랑한 본성과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저는 괴테의 삶을 보면서 이 사람의 위기 극복 능력이 참으로 독보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대표적인데요,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도저히 안 되는 사랑을 한 거잖아요. 괴테는 4주일간 미친 듯 작품을 쓰고 주인공을 죽이고는 자기 스스로는 그 문제를 넘어섭니다. 그는 쓰는 행위를 통해 삶에서 맞닥뜨린 문제가 뭔지를 파악했어요. 사실 문제가 뭔지 알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괴테처럼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작가를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그저 무얼 좀 배우고 싶었고, 그냥 무슨 수 쓰지 않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가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지더라고요.
그리고 제 경험상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집니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합니다. 내가 거쳐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요헨 골츠 회장님이 괴테의 이런 말을 한국 젊은이들을 위해 전했어요.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이라고요. '시간' 하면 쫓긴다는 생각부터 하는데, 정말 엄청난 정의를 내린 거죠. 순간순간 이 찰나야말로 진정한 나의 소유죠. 그러니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합니까.
젊은이들이 부동산, 주식 폭등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어떤 상황에서든 시간이라는 이 엄청난 재산을 마음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살 수 있답니다.
아버지의 호(號)를 빌려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 집'이라는 의미를 담은 여백 서원에서, 전 교수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찾아오는 손님도 맞습니다. ‘오마토’와 ‘시마토’라고 해서 5월과 10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학교 수업으로 인연 맺은 제자들과 정례 모임도 가집니다. 누구든지 참여해 책을 읽고, 밥도 해 먹고, 각자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삶을 다시 생각합니다. 괴테 마을, 젊은 괴테의 집 1층에는 지관서가가 자리해 있습니다. 이 가을 어느 쉬는 날, 느긋한 발걸음과 맑은 마음으로 선생이 삶으로 기록한 이 마을에 들러 여백의 시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괴테의 작품은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베토벤, 바그너, 멘델스존 등 많은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에 곡을 붙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란츠 슈베르트는 특히 괴테의 언어에 큰 영감을 받아 ‘마왕(Erlkönig)’, ‘들장미(Heidenröslein)’, ‘방랑자의 밤노래(Wandrers Nachtlied)’ 등 대표적인 가곡들을 남겼습니다.
괴테, Wandrers Nachtlied (방랑자의 밤노래) II (1780)
Über allen Gipfeln
Ist Ruh,
In allen Wipfeln
Spürest du
Kaum einen Hauch;
Die Vögelein schweigen im Walde.
Warte nur, balde
Ruhest du auch.
모든 산봉우리 위엔 고요,
모든 숲의 나뭇가지에도
아득한 숨결조차 느낄 수 없네.
작은 새들마저 숲 속에 고요히 잠들었구나.
잠시만 기다리라, 곧
너 또한 쉬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