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한 가을비가 뜨거웠던 팔월의 무더위를 재우며 보슬보슬 구월의 문을 열었습니다. 한참 가물었던 곳에는 오랜만에 연이어 내린 빗물이 반가운 단비일 텐데, 또 어느 지역에서는 비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으니 ‘비’ 하나로도 생生에 깊은 질문을 품게 됩니다. |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와 지구촌 곳곳의 이모저모를 전해 알려주던 뉴스 면 위에는 끔찍하고 걱정스런 사건, 사고 소식들만 앞다퉈 가득 메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챙긴다는 게 이웃과 사회의 소식에 점점 무감각해진 건 아닌가, 하고 안을 돌아봅니다. 지구별 위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또 새로운 달月에 도착한 우리 모두, 구월에도 ‘함께’ 안녕하기를! |
오래된 말의 힘을 빌려, 가을엔 ‘책’을 한 번이라도 더 펼치게 되지 않나요. 독서의 계절입니다. 침대 맡이나 테이블 위에,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또는 온라인 도서 구매처 장바구니 안에 어떤 책이 놓여있나요? |
조용히 종이책을 한장 한장 넘기며 읽는 행위는 그 어떤 문화적 소비 경험과 비교하여도 매우 특별하고 고귀한 경험인 듯합니다. 그 귀중한 경험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어떨까요.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함께 읽는' 사회적 독서 문화가 조용히 부상하고 있지요. 오늘은, 이름부터 흥미로운, 우리나라 대학생 연합 독서 동아리 '일꼬모'(일단 책 읽꼬 보는 모임)를 기사를 통해 만나보겠습니다. |
공부와 연애, 아르바이트로 바쁜 청춘들. 그들이 모여 책을 읽습니다. 서울시립대·한국외대·광운대 등의 대학생 10~15명이 함께하는 대학생 연합 독서 동아리 '일꼬모'는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소년이 온다'를 함께 모여 읽자는 제안에서 출발했습니다. |
"1조와 2조 나눠서 '책 이름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하겠습니다!" |
일꼬모의 정기 모임은 게임으로 시작됩니다. 김수형 회장(서울시립대 3학년)은 큰 화면에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강아지똥' '연금술사' '벌거벗은 임금님' 등의 책 제목을 표시합니다. 몸짓으로 책을 설명하는 사람, 정답을 외치는 사람, 키득키득 웃는 사람들이 뒤섞여, 강의실 안은 생동감으로 가득 찹니다.
이 모임에선 게임조차 책이 매개가 됩니다. '춘향전' '구운몽' '메밀꽃 필 무렵' 등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봤을 문학 작품으로 빙고 게임을 하며, 한 사람씩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의 장면이나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이렇게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모임엔 웃음이 가득 고이고, 친밀함이 쌓여갑니다. |
세상을 읽는 시간
이 모임만의 독특한 순서가 있습니다. '세상을 읽는 시간', 줄여서 '세읽시'입니다. 회원들이 돌아가며 역사와 사회 관련 다양한 이슈로 짧은 발제를 합니다. 한 모임에선 '12·3 내란 사태, 그리고 조희대 대법원장'이란 주제로 사건의 단서를 하나씩 제시하는 탐정물 형식으로 발표하고, 다른 모임에선 '윤동주를 죽인 치안유지법과 국가보안법'에 관해 소개합니다. 책만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함께 읽자는 취지입니다. |
본격적인 독서 토론 시간
회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김숨 작가의 소설 '한 명'을 읽고 조별로 40여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불쾌감이 든 것은 처음이었어요. 표현들이 적나라하잖아요. 나도 이렇게 힘든데, 피해자 본인은 어떻게 말하냐 이거죠.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손에 다슬기를 놓지 않는 장면이에요. 시간이 흘렀지만 피해자들의 피해는 끝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것 아닐까요?"(송은빈, 광운대 1학년)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체가 아니라 짐승으로 본 거죠. 여성 인권이 생각날 수밖에 없어요. 책을 읽고 전쟁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나부터 역사 바로 아는 것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에게 공유하기요."(한예진, 한국외대 3학년)
"한 글자 한 글자 넘어가는 게 힘들었어요. 박물관 가서 느꼈던 것이랑 활자인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었어요. 피해자들이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가해자인 일본은 한 번이라도 반성을 했나 싶어요."(이아무개, 광운대 4학년)
회원들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함께 분노했고, 미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들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혼자 읽어도 될 책을 이들은 왜 굳이 함께 읽을까?
회원 하명진씨는, "함께 읽으면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는 것을 넘어 행동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는 동아리에서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고 '5·18 민주화운동 답사'를 했고, 학내에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한마디를 받는 부스 활동도 했습니다.
"혼자였다면 사회 문제를 마주할 때 무력감만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 함께 읽고 토의하면서, 무력감이 아닌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 부스'를 운영했을 때 100명이 넘는 학우들이 참여했는데, 우리가 목소리를 내면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효능감'을 느꼈어요."
함께 읽는다는 것은 꾸준히 읽게 만드는 힘이 됐고, 자신이 읽지 않았던 책 읽기에도 도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
또, 회원 안호진씨는, "예전에 세 달에 한 권 책을 읽었다면, 동아리에 들어온 뒤 한 달에 한 권 이상 읽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비문학만 읽던 그는 이 모임에 들어온 뒤 소설과 시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읽기는 제게 약속과 성장이에요. 입시 할 땐 역사를 평면적으로 이해했는데, 김숨 작가의 '한 명' 같은 작품을 읽고 나서는 피해자의 충격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건조하게 생각했던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된 거죠.” |
김수형 회장은 모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회는 20대에게 스펙 쌓고 취업 잘하라고 요구합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결혼과 내 집 마련 등 계속 전투를 해야 하잖아요. 그렇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알고 가야 할 역사가 있고, 민주주의나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처럼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동아리 안에서 저희는 그 가치들을 책을 통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임이 그 치열하고 빡빡한 일상에서 회원들에게 한 줄기 휴식처, 쉼터가 되면 좋겠습니다.” |
‘읽기, 사유 그리고 문학적 텍스트’를 핵심 주제로 창작된 엠비언트 음악이 있습니다.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네오클래식의 거장, 현대음악 작곡가 ‘맥스 리히터(Max Richter)’의 2004년 작품 《The Blue Notebooks》입니다. |
맥스 리히터는 이 앨범을 구상할 때 '문학을 접할 때의 감각'을 음향으로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앨범 중간중간에 종이책 책장을 넘기는 소리, 옛 타자기 자판을 치는 소리, 연필로 글씨를 써 내려가는 아날로그 소음을 엠비언트 신시사이저 잔향과 섞어서 배치하여 청자로 하여금 독특하고도 깊은 사유의 서재로 안내합니다. 특히 영국 배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카프카와 밀로시의 텍스트를 나지막이 낭독하는 트랙들은 문학 텍스트를 음악의 멜로디와 동일한 비중의 악기로 다루며 음악 감상의 행위를 '문학을 귀로 읽는 경험'으로 확장합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거칠고 폭력적인 세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장 고요하고 깊은 내면의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고 사유하는 정적인 저항으로써, 작곡가는 음악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했습니다. 이 음반은 책을 읽을 때 배경으로 음악을 넓게 펼쳐두셔도, 책 없이, 마치 음악을 읽는 듯이 음반 전체를 찬찬히 감상하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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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재단법인 止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7길 32 SK관훈빌딩 11층 수신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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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한 가을비가 뜨거웠던 팔월의 무더위를 재우며 보슬보슬 구월의 문을 열었습니다. 한참 가물었던 곳에는 오랜만에 연이어 내린 빗물이 반가운 단비일 텐데, 또 어느 지역에서는 비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으니 ‘비’ 하나로도 생生에 깊은 질문을 품게 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와 지구촌 곳곳의 이모저모를 전해 알려주던 뉴스 면 위에는 끔찍하고 걱정스런 사건, 사고 소식들만 앞다퉈 가득 메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챙긴다는 게 이웃과 사회의 소식에 점점 무감각해진 건 아닌가, 하고 안을 돌아봅니다. 지구별 위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또 새로운 달月에 도착한 우리 모두, 구월에도 ‘함께’ 안녕하기를!
오래된 말의 힘을 빌려, 가을엔 ‘책’을 한 번이라도 더 펼치게 되지 않나요. 독서의 계절입니다. 침대 맡이나 테이블 위에,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또는 온라인 도서 구매처 장바구니 안에 어떤 책이 놓여있나요?
조용히 종이책을 한장 한장 넘기며 읽는 행위는 그 어떤 문화적 소비 경험과 비교하여도 매우 특별하고 고귀한 경험인 듯합니다. 그 귀중한 경험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어떨까요.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함께 읽는' 사회적 독서 문화가 조용히 부상하고 있지요. 오늘은, 이름부터 흥미로운, 우리나라 대학생 연합 독서 동아리 '일꼬모'(일단 책 읽꼬 보는 모임)를 기사를 통해 만나보겠습니다.
공부와 연애, 아르바이트로 바쁜 청춘들. 그들이 모여 책을 읽습니다. 서울시립대·한국외대·광운대 등의 대학생 10~15명이 함께하는 대학생 연합 독서 동아리 '일꼬모'는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소년이 온다'를 함께 모여 읽자는 제안에서 출발했습니다.
"1조와 2조 나눠서 '책 이름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하겠습니다!"
일꼬모의 정기 모임은 게임으로 시작됩니다. 김수형 회장(서울시립대 3학년)은 큰 화면에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강아지똥' '연금술사' '벌거벗은 임금님' 등의 책 제목을 표시합니다. 몸짓으로 책을 설명하는 사람, 정답을 외치는 사람, 키득키득 웃는 사람들이 뒤섞여, 강의실 안은 생동감으로 가득 찹니다.
이 모임에선 게임조차 책이 매개가 됩니다. '춘향전' '구운몽' '메밀꽃 필 무렵' 등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봤을 문학 작품으로 빙고 게임을 하며, 한 사람씩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의 장면이나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이렇게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모임엔 웃음이 가득 고이고, 친밀함이 쌓여갑니다.
세상을 읽는 시간
이 모임만의 독특한 순서가 있습니다. '세상을 읽는 시간', 줄여서 '세읽시'입니다. 회원들이 돌아가며 역사와 사회 관련 다양한 이슈로 짧은 발제를 합니다. 한 모임에선 '12·3 내란 사태, 그리고 조희대 대법원장'이란 주제로 사건의 단서를 하나씩 제시하는 탐정물 형식으로 발표하고, 다른 모임에선 '윤동주를 죽인 치안유지법과 국가보안법'에 관해 소개합니다. 책만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을 함께 읽자는 취지입니다.
본격적인 독서 토론 시간
회원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김숨 작가의 소설 '한 명'을 읽고 조별로 40여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불쾌감이 든 것은 처음이었어요. 표현들이 적나라하잖아요. 나도 이렇게 힘든데, 피해자 본인은 어떻게 말하냐 이거죠.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손에 다슬기를 놓지 않는 장면이에요. 시간이 흘렀지만 피해자들의 피해는 끝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것 아닐까요?"(송은빈, 광운대 1학년)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체가 아니라 짐승으로 본 거죠. 여성 인권이 생각날 수밖에 없어요. 책을 읽고 전쟁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나부터 역사 바로 아는 것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에게 공유하기요."(한예진, 한국외대 3학년)
"한 글자 한 글자 넘어가는 게 힘들었어요. 박물관 가서 느꼈던 것이랑 활자인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었어요. 피해자들이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가해자인 일본은 한 번이라도 반성을 했나 싶어요."(이아무개, 광운대 4학년)
회원들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함께 분노했고, 미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들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혼자 읽어도 될 책을
이들은 왜 굳이 함께 읽을까?
회원 하명진씨는, "함께 읽으면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는 것을 넘어 행동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는 동아리에서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고 '5·18 민주화운동 답사'를 했고, 학내에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한마디를 받는 부스 활동도 했습니다.
"혼자였다면 사회 문제를 마주할 때 무력감만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 함께 읽고 토의하면서, 무력감이 아닌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 부스'를 운영했을 때 100명이 넘는 학우들이 참여했는데, 우리가 목소리를 내면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효능감'을 느꼈어요."
함께 읽는다는 것은 꾸준히 읽게 만드는 힘이 됐고, 자신이 읽지 않았던 책 읽기에도 도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회원 안호진씨는, "예전에 세 달에 한 권 책을 읽었다면, 동아리에 들어온 뒤 한 달에 한 권 이상 읽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비문학만 읽던 그는 이 모임에 들어온 뒤 소설과 시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읽기는 제게 약속과 성장이에요. 입시 할 땐 역사를 평면적으로 이해했는데, 김숨 작가의 '한 명' 같은 작품을 읽고 나서는 피해자의 충격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건조하게 생각했던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된 거죠.”
김수형 회장은 모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회는 20대에게 스펙 쌓고 취업 잘하라고 요구합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결혼과 내 집 마련 등 계속 전투를 해야 하잖아요. 그렇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알고 가야 할 역사가 있고, 민주주의나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처럼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동아리 안에서 저희는 그 가치들을 책을 통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임이 그 치열하고 빡빡한 일상에서 회원들에게 한 줄기 휴식처, 쉼터가 되면 좋겠습니다.”
‘읽기, 사유 그리고 문학적 텍스트’를 핵심 주제로 창작된 엠비언트 음악이 있습니다.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네오클래식의 거장, 현대음악 작곡가 ‘맥스 리히터(Max Richter)’의 2004년 작품 《The Blue Notebooks》입니다.
Richter: The Blue Notebooks
맥스 리히터는 이 앨범을 구상할 때 '문학을 접할 때의 감각'을 음향으로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앨범 중간중간에 종이책 책장을 넘기는 소리, 옛 타자기 자판을 치는 소리, 연필로 글씨를 써 내려가는 아날로그 소음을 엠비언트 신시사이저 잔향과 섞어서 배치하여 청자로 하여금 독특하고도 깊은 사유의 서재로 안내합니다. 특히 영국 배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카프카와 밀로시의 텍스트를 나지막이 낭독하는 트랙들은 문학 텍스트를 음악의 멜로디와 동일한 비중의 악기로 다루며 음악 감상의 행위를 '문학을 귀로 읽는 경험'으로 확장합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거칠고 폭력적인 세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장 고요하고 깊은 내면의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고 사유하는 정적인 저항으로써, 작곡가는 음악을 통해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했습니다. 이 음반은 책을 읽을 때 배경으로 음악을 넓게 펼쳐두셔도, 책 없이, 마치 음악을 읽는 듯이 음반 전체를 찬찬히 감상하셔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