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0여 년 전, 플라톤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조건으로 ‘정의’를 내세웠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루는 국가, 그것이 플라톤이 꿈꾼 이상 공동체였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곁에는 ‘손절’이라는 서늘한 단어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관계마저 효율과 손익을 따져 가차 없이 끊어내는 시대. 플라톤의 고결한 이상과 ‘손절사회’의 냉정한 현실, 그 아득한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연결되어야 할까요?
플라톤의 『국가』가 제시하는 공동체는 ‘정의’라는 거대한 뿌리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올바름이라는 공동의 선(善)을 향할 때 비로소 국가는 안정되고 개인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의무와 역할,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 이 고전적 공동체론에서 질서와 기능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이지, 그 자체로 최고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연의 『손절사회』는 현대 사회가 그 가치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뒤집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효율’과 ‘개인의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는 듯합니다. 관계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나의 성장, 안정, 만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로 평가받는 투자 대상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가성비’와 ‘손익’의 잣대가 인간관계마저 잠식하면서, 유용하지 않거나 감정적 소모를 유발하는 관계는 너무도 쉽게 ‘손절’되고 맙니다.
이 서늘한 시대의 풍경은 특별한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친구를 사귀고, 모임에 참여하고, 직장 동료와 거리를 조절하는 일상적 순간들 속에서도 관계를 하나의 선택지처럼 다루곤 합니다. 대화가 조금 불편하거나 속도가 맞지 않고, 취향과 성향이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도 관계는 쉽게 멀어집니다. 예전 같으면 부딪치고 조율하며 이어 갔을 인연들이 이제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조용히 정리되곤 합니다. 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경계 설정은 필요하며, 모든 관계를 무조건 지속하는 것이 미덕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관계를 견디고 조정하는 과정 자체가 점점 불필요한 비용처럼 여겨진다는 데 있습니다. 관계마저 효율과 선택의 언어로 설명되는 시대에, 사람들은 상처를 피하는 데에는 익숙해졌지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는 점점 서툴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끊어냄이 연결보다 더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관계의 고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양성민의 『인생여전』은 뜻밖의 자리에서 그 실마리를 건넵니다. 바로 ‘공감’이라는, 계산과 효율의 언어로는 쉽게 환산되지 않는 가치에서 말입니다.
양성민의 『인생여전』은 예측 불가능한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담담히 보여줍니다. 책 속 인물들의 관계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으로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이라는 고된 여정 위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짐을 잠시 나눠 들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동행자’가 됩니다. 이는 목적 지향적인 ‘손절사회’의 관계 맺기와는 정반대의 풍경입니다. 당장의 이익이나 쓸모가 없더라도, 그저 함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이해관계를 넘어선 ‘공감’의 힘입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효율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효율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될 때 시작됩니다. 『손절사회』의 경고처럼, 효율과 개인주의만이 남은 사회의 끝은 결국 모두가 외로운 파편으로 부서지는 세상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단절의 기술이 아니라, 다시 연결되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2,400여 년 전, 플라톤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조건으로 ‘정의’를 내세웠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며 조화를 이루는 국가, 그것이 플라톤이 꿈꾼 이상 공동체였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곁에는 ‘손절’이라는 서늘한 단어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관계마저 효율과 손익을 따져 가차 없이 끊어내는 시대. 플라톤의 고결한 이상과 ‘손절사회’의 냉정한 현실, 그 아득한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연결되어야 할까요?
플라톤의 『국가』가 제시하는 공동체는 ‘정의’라는 거대한 뿌리 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올바름이라는 공동의 선(善)을 향할 때 비로소 국가는 안정되고 개인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의무와 역할,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 이 고전적 공동체론에서 질서와 기능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이지, 그 자체로 최고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연의 『손절사회』는 현대 사회가 그 가치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뒤집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효율’과 ‘개인의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는 듯합니다. 관계는 더 이상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나의 성장, 안정, 만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로 평가받는 투자 대상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가성비’와 ‘손익’의 잣대가 인간관계마저 잠식하면서, 유용하지 않거나 감정적 소모를 유발하는 관계는 너무도 쉽게 ‘손절’되고 맙니다.
이 서늘한 시대의 풍경은 특별한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친구를 사귀고, 모임에 참여하고, 직장 동료와 거리를 조절하는 일상적 순간들 속에서도 관계를 하나의 선택지처럼 다루곤 합니다. 대화가 조금 불편하거나 속도가 맞지 않고, 취향과 성향이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도 관계는 쉽게 멀어집니다. 예전 같으면 부딪치고 조율하며 이어 갔을 인연들이 이제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조용히 정리되곤 합니다. 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경계 설정은 필요하며, 모든 관계를 무조건 지속하는 것이 미덕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관계를 견디고 조정하는 과정 자체가 점점 불필요한 비용처럼 여겨진다는 데 있습니다. 관계마저 효율과 선택의 언어로 설명되는 시대에, 사람들은 상처를 피하는 데에는 익숙해졌지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는 점점 서툴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끊어냄이 연결보다 더 합리적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관계의 고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양성민의 『인생여전』은 뜻밖의 자리에서 그 실마리를 건넵니다. 바로 ‘공감’이라는, 계산과 효율의 언어로는 쉽게 환산되지 않는 가치에서 말입니다.
양성민의 『인생여전』은 예측 불가능한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담담히 보여줍니다. 책 속 인물들의 관계는 혈연이나 학연, 지연으로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이라는 고된 여정 위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짐을 잠시 나눠 들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동행자’가 됩니다. 이는 목적 지향적인 ‘손절사회’의 관계 맺기와는 정반대의 풍경입니다. 당장의 이익이나 쓸모가 없더라도, 그저 함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이해관계를 넘어선 ‘공감’의 힘입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효율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효율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될 때 시작됩니다. 『손절사회』의 경고처럼, 효율과 개인주의만이 남은 사회의 끝은 결국 모두가 외로운 파편으로 부서지는 세상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단절의 기술이 아니라, 다시 연결되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관계의 비용과 기회비용
불확실성과 유동성이 만연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 그 자체가 경영을 통해 끊임없이 상품 가치를 높여야 할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지속적 자기 계발과 모니터링을 통해 우리 자신의 상품 가치를 유지하거나 높이고, 나의 값을 가장 잘 쳐줄 곳을 찾느라 이곳저곳을 헤매야 하는 상황에서는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관계를 사치로, 심지어는 장애물로 느낄 수밖에 없다. (p.18)
"아마도 건강한 것들은 건강을 생기게 하고, 건강하지 못한 것들은 병을 생기게 할 걸세."
"그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은 정의를 생기게 하고, 부정의한 행위를 하는 것은 부정의를 생기게 하지 않겠는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건강을 생기게 함은 몸 안에 있는 것들이 본성에 맞게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도록 확립하는 것인 반면, 병을 생기게 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본성에 어긋나게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도록 확립하는 것일세."
"그야 그렇죠."(p.306)
정들면 고향
더러는 이곳이 새로운 고향이 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떨어져 나온 나무는 저마다 달라도 한 소쿠리 안에 놓여 함께 익어가는 가을 곶감처럼, 베트남인도 네팔인도 함께 살며 정답게 익어가는 이웃사촌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어데 고향이 따로 있나. 정들어 살면 그곳이 고향인 것이다. (p.173)
*유료 협찬 콘텐츠로 2026.6.30까지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