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1898) |
표준국어대사전은 형이상학을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에 의하여 탐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합니다. 어원적으로는 '형체 그 너머(Meta-physics)'를 탐구한다는 뜻이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숫자, 눈앞의 이익, 생존을 위한 반복적인 과업들을 '형이하학'의 세계라 한다면, 그 구체적인 현상 이면에 숨겨진 근본 원리와 보편적 가치를 묻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입니다. 세상이 이미 정의된 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너머를 자유롭게 탐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AI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유일하고도 고귀한 능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참을성이 없습니다. 깊이 고찰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속도의 시대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오직 형이하학적인 파편들에만 매몰되어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효율로 환산되고 데이터로 증명되는 세상 앞에, 나약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이 근원적인 무력감을 이겨내고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요? 고립된 '나'라는 파편에 머물지 않고, 더 큰 존재의 층위를 향해 나아가는 형이상학적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인간은 본래 '형이상학적 동물'입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의 문턱에서 굳건히 머무를 때, 무엇을 열망하는지조차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고 팽팽한 긴장을 견뎌낼 때, 비로소 초월을 향한 '넘어감'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깨어남은 지금 이 순간 나의 태도를 바꾸는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이번 호 〈지관의 계절 서재〉에서는 그 선택을 돕기 위한 네 권의 지도를 제안합니다. 혼돈의 시대 속에서도 삶의 본질을 치열하게 물었던 네 여성 철학자의 발자취를 담은 『형이상학적 동물들』 (전병근 지식큐레이터 추천), 분절된 자아를 넘어 우주적 전체성을 회복하라는 『빅 홀니스』 (성해영 교수 추천), 유한한 삶의 고통을 파괴가 아닌 예술적 긍정으로 승화시킨 니체의 『비극의 탄생』 (한충수 교수 추천), 그리고 신비주의적 통찰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신에 관하여』 (성해영 교수 추천)입니다.
결국 형이상학이란 저 멀리 신학자나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소란한 세상의 소음을 뚫고 내 안의 고요와 본질을 선택해 나만의 길을 잃지 않게 비춰주는 ‘사유의 등불’이 아닐까 합니다. 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빠르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 봄이 다 가기 전, 우리의 한계를 견뎌내며 내 안의 고요와 새로움을 향해 눈을 뜨는 ‘형이상학적 깨어남’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지 모릅니다.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봄’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 온전한 나를 찾는 삶의 여정 앞에, 이제 당신의 영혼을 향해 외치십시오. "Wake Up!" |
📚 『형이상학적 동물들』 클레어 맥 쿠얼 & 레이철 와이즈먼, 바다출판사, 2025 |
인간이 막대한 규모의 행위를 벌이거나 불안정하고 힘겨운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 누구나 벌어진 일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누구나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다. 우리 삶의 배경이 흔들리면 우리의 언어는 과거처럼 작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도 쓸모없어질 수 있다. 때로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타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또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거나 어둡게 보일 수 있다. 바로 이때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 철학이다. (p.36) |
철학계를 지배한 남성들이 전쟁에 불려 간 사이, 옥스퍼드의 네 여성은 어떻게 철학의 본령인 형이상학을 되살리고 대항 서사를 엮어 갔던가. 도전과 방황, 사랑과 우정, 연대와 협력의 장면들이 페이지마다 빛난다. 고독한 개인들의 무한 경쟁을 숙명처럼 보는 가부장적 자본 기술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듯한 지금, 관계와 돌봄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 같은 책이다. 전병근 지식큐레이터 |
📚 『비극의 탄생』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서울: 아카넷, 2007 |
예술이 자연현실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자연현실의 형이상학적 보충이며, 자연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것 옆에 대등하게 놓여진 것이라면, 삶이란 실제로 그렇게 비극적이기 마련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어떠한 예술형식의 발생을 조금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비극적 신화도 그것이 적어도 예술에 속하는 한, 예술 일반이 갖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찬란한 변용이라는 목표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상세계를 고통받는 영웅의 형상아래서 제시할 경우, 그것은 무엇을 찬란하게 변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러한 현상세계의 '실재'를 찬란하게 변용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잘 보아라! 이것이 그대들의 인생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생존의 시계바늘인 것이다!"(p.43) |
봄에 두 번째로 추천할 책은 독일 사상가 프리드리히 니체의 <<비극의 탄생>>입니다. 그는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고전 어문학을 전공하다가 그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스물네 살에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합니다. 학계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고자 야심 차게 세상에 내놓은 첫 저서가 바로 이 책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성장, 그리고 몰락에 이르기까지를 니체가 독창적으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이 해석을 관통하는 두 충동 가운데, 더 근원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 충동입니다. 이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삶을 도취와 환희로 어우르는 힘으로, 봄날 자연이 뿜어내는 생명력과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봄의 활력을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인상 깊은 구절 하나를 옮깁니다. “자연 전체를 환희로 채우면서 스며드는 강력한 봄기운을 통해서 저 디오니소스적인 흥분이 일깨워진다. 이 흥분이 고조되면서 주체적인 것은 완전한 자기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한충수 교수 |
📚 『빅 홀니스』 켄 윌버 지음, 추미란 옮김, 판미동, 2025 |
성장이란 무엇일까? 왜 그럴까? 왜냐하면 인간은 성장하고 발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 그러니까 모든 능력이 성장하고 발달한다는 뜻이다. 뼈, 피부, 근육만이 아니라 생각, 감정, 언어적 능력, 정신적 역량 그리고 도덕 지수까지 발달한다. 모든 것이 성장하고 발달한다. 우리가 가진 능력 중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능력은 하나도 없다. 모든 능력은 어떤 형태로든 성장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p.58) |
켄 윌버(Ken Wilber)는 그의 영적 여정을 ‘근원적 전체성(radical Wholeness)’의 발견이라 역설한다. 이 책에서 그는 동서양 종교, 과학과 영성, 심리학과 신비주의,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인류 역사의 과정을 참으로 아름답고 명료하게 그려낸다. ‘열림, 성장, 정화, 깨어남’을 거쳐 ‘지복(至福, Bliss)’의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성해영 교수 |
📚 『신에 관하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김영사, 2025 |
영혼의 영원한 부분은 굶주림을 먹고 산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몸은 자신의 살을 소화하여 에너지로 변환한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먹지 않는 영혼은 영혼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부분을 소화하고 변화시킨다. 영혼의 굶주림은 견뎌내기 어렵지만, 병을 치유하는 다른 수단은 없다. 굶주림은 살아 있는 몸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영혼의 부분을 죽게 한다. 그리하여 살로 이루어진 몸이 단박에 신에게 종사하게 된다. (p.13) |
저자는 신비주의자였던 시몬 베유와의 만남을 통해 종교가 위기를 맞이한 시대에 새로운 초월의 가능성과 '신'의 의미를 모색한다. 우리는 주의 깊게 각자의 내면 깊숙이 침잠해, 자기를 벗어날 때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비움과 자기 초월의 차원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디지털과 AI가 문명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점에, 아이러니하게도 신비주의적 탐색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찾는 희망이 싹튼다. 성해영 교수 |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I 고전5미닛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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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협찬 콘텐츠로 2026.5.31까지 시청 가능합니다. |
📺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 I 세바시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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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철학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ㅣEBS 위대한 수업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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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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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은 형이상학을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에 의하여 탐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합니다. 어원적으로는 '형체 그 너머(Meta-physics)'를 탐구한다는 뜻이죠.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숫자, 눈앞의 이익, 생존을 위한 반복적인 과업들을 '형이하학'의 세계라 한다면, 그 구체적인 현상 이면에 숨겨진 근본 원리와 보편적 가치를 묻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입니다. 세상이 이미 정의된 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너머를 자유롭게 탐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AI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유일하고도 고귀한 능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참을성이 없습니다. 깊이 고찰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속도의 시대 속에서, 우리의 시선은 오직 형이하학적인 파편들에만 매몰되어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효율로 환산되고 데이터로 증명되는 세상 앞에, 나약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이 근원적인 무력감을 이겨내고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요? 고립된 '나'라는 파편에 머물지 않고, 더 큰 존재의 층위를 향해 나아가는 형이상학적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인간은 본래 '형이상학적 동물'입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의 문턱에서 굳건히 머무를 때, 무엇을 열망하는지조차 모르는 막막함 속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고 팽팽한 긴장을 견뎌낼 때, 비로소 초월을 향한 '넘어감'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깨어남은 지금 이 순간 나의 태도를 바꾸는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이번 호 〈지관의 계절 서재〉에서는 그 선택을 돕기 위한 네 권의 지도를 제안합니다. 혼돈의 시대 속에서도 삶의 본질을 치열하게 물었던 네 여성 철학자의 발자취를 담은 『형이상학적 동물들』 (전병근 지식큐레이터 추천), 분절된 자아를 넘어 우주적 전체성을 회복하라는 『빅 홀니스』 (성해영 교수 추천), 유한한 삶의 고통을 파괴가 아닌 예술적 긍정으로 승화시킨 니체의 『비극의 탄생』 (한충수 교수 추천), 그리고 신비주의적 통찰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신에 관하여』 (성해영 교수 추천)입니다.
결국 형이상학이란 저 멀리 신학자나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소란한 세상의 소음을 뚫고 내 안의 고요와 본질을 선택해 나만의 길을 잃지 않게 비춰주는 ‘사유의 등불’이 아닐까 합니다. 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빠르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 봄이 다 가기 전, 우리의 한계를 견뎌내며 내 안의 고요와 새로움을 향해 눈을 뜨는 ‘형이상학적 깨어남’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지 모릅니다.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봄’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 온전한 나를 찾는 삶의 여정 앞에, 이제 당신의 영혼을 향해 외치십시오.
"Wake Up!"
인간이 막대한 규모의 행위를 벌이거나 불안정하고 힘겨운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 누구나 벌어진 일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누구나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다. 우리 삶의 배경이 흔들리면 우리의 언어는 과거처럼 작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도 쓸모없어질 수 있다. 때로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타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또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거나 어둡게 보일 수 있다. 바로 이때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 철학이다. (p.36)
예술이 자연현실의 모방일 뿐만 아니라 자연현실의 형이상학적 보충이며, 자연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것 옆에 대등하게 놓여진 것이라면, 삶이란 실제로 그렇게 비극적이기 마련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어떠한 예술형식의 발생을 조금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비극적 신화도 그것이 적어도 예술에 속하는 한, 예술 일반이 갖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찬란한 변용이라는 목표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상세계를 고통받는 영웅의 형상아래서 제시할 경우, 그것은 무엇을 찬란하게 변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러한 현상세계의 '실재'를 찬란하게 변용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잘 보아라! 이것이 그대들의 인생이다! 이것이 그대들의 생존의 시계바늘인 것이다!"(p.43)
성장이란 무엇일까?
왜 그럴까? 왜냐하면 인간은 성장하고 발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 그러니까 모든 능력이 성장하고 발달한다는 뜻이다. 뼈, 피부, 근육만이 아니라 생각, 감정, 언어적 능력, 정신적 역량 그리고 도덕 지수까지 발달한다. 모든 것이 성장하고 발달한다. 우리가 가진 능력 중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능력은 하나도 없다. 모든 능력은 어떤 형태로든 성장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p.58)
영혼의 영원한 부분은 굶주림을 먹고 산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몸은 자신의 살을 소화하여 에너지로 변환한다. 영혼도 마찬가지다. 먹지 않는 영혼은 영혼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부분을 소화하고 변화시킨다. 영혼의 굶주림은 견뎌내기 어렵지만, 병을 치유하는 다른 수단은 없다. 굶주림은 살아 있는 몸에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영혼의 부분을 죽게 한다. 그리하여 살로 이루어진 몸이 단박에 신에게 종사하게 된다. (p.13)
*유료 협찬 콘텐츠로 2026.5.31까지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