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지관

위클리 지관에서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잠시 '멈춤'신호를 받을 수 있는 삶의 물음들을 살펴봅니다. 책, 영화, 강연, 칼럼 등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서 매주 하나의 물음을 사유합니다. 매주 수요일,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VOL.228] 다시 살아내는 이들의 계절

김은희
2026-02-16
조회수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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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끝에 맺힌 매서운 공기의 질감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얼어붙은 지표면을 뚫고 나오는 가녀린 새순 뒤에는, 차가운 흙 속에서 제 몸을 찢으며 버텨온 뿌리의 사투가 숨어 있습니다. 이처럼 봄은 당연하게 찾아오는 듯 보이지만, 사실 죽음 같은 시련을 견뎌낸 존재들만이 누리는 가혹하고도 아름다운 보상일지 모릅니다.

그동안 반기마다 하나의 ‘인생 테마’로 도서를 선정해 온 <지혜의 나무>가 사계절의 흐름에 맞춰 도서를 추천하는 <지관의 계절서재>라는 이름으로 새 단장을 하였습니다. 이번 봄, 전문가들의 안목으로 새롭게 선정된 도서들이 우리 영혼에 사유의 불씨를 지피길 기대하며, 세 분이 전하는 통찰의 문장들로 올봄의 첫 페이지를 열어봅니다.

이번 <봄>의 첫 추천작은 전병근 지식 큐레이터가 추천한 황석영의 『할매』, 이현정 교수가 소개하는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 그리고 한충수 교수의 추천 도서인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짝사랑』입니다. 이 세 권은 각기 다른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공통적으로 '폐허 위에서도 기어이 살아내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황석영 작가의 『할매』 속 팽나무는 마을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낸 산증인입니다. 전쟁과 가난, 소중한 이들이 떠나가는 상실의 세월 속에서도 나무는 자리를 옮기지 않습니다. 그저 깊게 뿌리 내리고 서서 다음 계절이 올 때까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킵니다. 팽나무에게 봄은 화사한 꽃구경이 아니라, 옹이진 상처마다 다시금 푸른 피를 돌게 하는 치열한 복원의 시간입니다.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 속 로버트 그레인의 삶 또한 이와 닮아 있습니다. 화재로 가족과 집을 한순간에 잃은 그는 무너지는 대신 다시 나무를 베고 길을 닦는 노동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문명의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는 고독한 황무지에서, 그는 비극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견뎌냅니다. 그에게 도끼질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내면을 다시 세우기 위해 매일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치유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살아있음이란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슬픔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도 매일 아침을 맞이하며 묵묵히 일과를 이어가는 숭고한 반복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짝사랑』이 있습니다. 소년 블라디미르에게 첫사랑은 눈부신 봄 햇살 같았으나,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마주하며 소년의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소년의 세계를 부순 것은 배신감이라기보다 삶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가혹한 진실이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소년은 내면의 폐허 위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열병 같은 통증을 통과하며 비로소 ‘어른의 계절’로 진입합니다. 그 균열을 통해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깊은 시선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소년이 맞이한 인생의 첫 번째 '진짜 봄'이었습니다. 첫사랑의 아픔을 견뎌내는 과정은 곧 자아의 겨울을 이겨내고 한 뼘 더 자라나는 성장의 시간인 셈입니다.

다시, 살아내는 이들의 계절

팽나무의 굽은 가지와 로버트 그레인의 거친 손등, 그리고 소년의 눈물이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간다.”라는 의지라 생각합니다. 고난과 슬픔을 껴안은 채 오늘을 살아내는 관성, 그 견딤의 시간 자체가 이미 우리 마음 속의 봄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사투가 벌어지고 있나요? 아직은 차갑기만 한 지표면 아래에서 당신의 뿌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봄을 마중 나가고 있나요? 당신이 묵묵히 버텨온 지난 겨울의 모든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이 세 권의 책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올봄, <지관의 계절 서재>가 소개하는 책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이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기지개를 켜며,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봄햇살처럼 피어나길 바랍니다.  


봄 / 나태주 

봄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아직은 겨울이지 싶을 때 봄이고
아직은 봄이겠지 싶을 때 여름인 봄
너무나 힘들게 더디게 왔다가
너무나 빠르게 허망하게 
가버리는 봄
우리네 인생에도
봄이란 것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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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매 황석영 지음, 창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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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서 세모 또는 길쭉하고 아니면 동그란 각종의 눈들이 겉으로 흘러나와 말라붙은 끈적한 진물과 몇겹의 보자기로 감싼 듯 딱딱하게 굳은 껍질의 틈을 헤치고 아주 조금씩 싹을 밀어냈다. 겨울눈을 따서 헤쳐보면 수십장의 미세한 잎들이 돌돌 말려서 겹쳐 있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겨울은 모든 활동을 멈춘 나무 자신의 몸속에 몸의 부활을 간직하게 하는 일시적인 기다림의 기간이었다. (p.43)

이 땅의 기구한 민중의 정서와 회한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포착하고 이야기로 엮는 데 평생을 걸어 온 팔순의 작가가 이 현란한 기술의 터보엔진을 달고 숨가쁘게 질주하는 21세기 인류 문명 앞에 철따라 한반도를 거처 삼아 생을 이어가는 뭇 철새를 비롯한 가녀린 동식물에다 육백년 묵은 서낭목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펼쳐놓은 까닭은 뭘까. 신기루 같은 디지털 초연결의 시대에 생명에 대해 이어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볼 기회다. 
전병근 지식 큐레이터

📚 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김승욱역, 다산책방,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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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몇 명이 가족과 함께 돌아와 모이 계곡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했다. 그레이니어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5월에 강가에서 야영하면서 낚시질로 무지개송어를 잡고, 캐나다인들이 모렐이라고 부르는 아주 향기롭고 희귀한 버섯을 찾아다녔다. 불길이 휩쓸고 간 땅에서 솟아나는 버섯이었다. 여러 날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던 그레이니어는 옛 집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까지 온 것을 깨닫고 자신과 글래디스가 물가를 오갈 때 항상 이용하던 골짜기를 올라갔다. 모두가 죽어버린 땅에 벌써 새싹과 꽃이 지천으로 올라와 있는 광경이 놀라운 따름이었다. (p.53)

미국 서부의 거친 황야를 배경으로, 상실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는 로버트 그레이니어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처럼 펼쳐진다. 데니스 존슨은 간결하면서도 칼날처럼 예리한 문체로 고독의 심연을 파고들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을 독자에게 불러일으킨다. 웅장한 자연 앞에 선 초라한 인간이 보여주는 숭고한 품격은, 책장을 덮은 후에도 기차 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이현정 교수

📚 첫사랑, 짝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손재은 옮김, 파주: arte,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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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서 이 시구가 울렸다. 아, 청춘이여! 청춘이여! 너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구나. 너는 마치 우주의 온갖 보물을 다 지닌 것만 같구나. 우수도 네게는 위로가 되고, 슬픔조차도 네게는 잘 어울린다. 너는 자신만만하며 대담하다. '나는 혼자서 살아간다, 보아라!'하고 너는 말하지만, 좋은 시절은 흘러가고,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덧없이 사라진다. 그러면 네 모든 것은 태양 아래 양초처럼, 눈처럼 녹아 사라진다.... 어쩌면 네가 지닌 아름다움의 모든 비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가 다른 것을 위해서는 쓸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그 힘을 바람결에 흩날려 보내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p.120)

봄에는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을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봄기운이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사랑, 특히 첫사랑일 것입니다. 이 소설은 마흔 살의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열여섯 살에 겪었던 첫사랑을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이웃집에 살던 다섯 살 연상 여인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를 간절하면서도 애틋하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첫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약 오 년 후, 블라디미르는 그녀의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만, 이미 그녀는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그는 그녀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인상 깊은 구절 하나를 옮깁니다. “벌써 내 인생에 황혼의 그림자가 몰려오기 시작하는 지금, 빠르게 스쳐 지나가 버린 봄날 아침의 뇌우에 대한 기억보다 더 신선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한충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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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I 고전5미닛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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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협찬 콘텐츠로 2026.3.31까지 시청 가능합니다. 


📺 How books can open your mind I TED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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