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은행잎에 노란물도 채 덜 들었는데. 아직 곳곳에 가을색 옷 환복을 덜 마친 단풍나무도 수두룩한데. 계절력은 어느새 입동(立冬, 11월 7일)에 접어들고, 입동보다도 서둘러 겨울 추위가 열 걸음 더 일찍 찾아왔네요. 며칠 전부터 아침에 들이마시는 공기는 영락없이 겨울의 것입니다. 코끝이 매운 손에 꼬집힌 듯 시립니다. |
겨울을 좋아하시나요? 독자님께 겨울은, 어떤 의미로 저장되어 있나요? 저는 괜스레, 한 시절 꼭 껴안고 있던 것을 고스란히 훌훌 떠나보내는 나무와 꽃들의 모습에, 두터운 옷가지들에 몸을 푹 숨기고 어깨까지 말아서 움츠러든 거리 위 사람들 풍경에 그리고, 이 계절 동안은 깨우지 말라는 듯 꽁꽁 얼어붙어 긴 잠이 든 대지의 얼굴에서 ‘이별, 무상함, 외로움’ 같은 것이 여민 가슴 품속으로 짙어져 옵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서점, 카페,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이 양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고, 벌써부터 첫눈을 기대하는 설렘이 가슴안을 두드립니다.
겨울을 몇 걸음 앞둔 지금, 올해 나의 겨울은 ‘어떤 의미’로 다시 써 내려가면 좋을지. 잠시 작가가 되어 나의 이번 겨울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요. |
현시대의 '외로움'은 '유행병'이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앓고 있는 아주 흔한 정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도로 산업화된 삶, 대도시로 몰려드는 인구,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은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외로움’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청년부터 노인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외로움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서울특별시가 '외로움 없는 서울' 정책을 발표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한 전담 콜센터 '외로움안녕120'을 운영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동시에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년 국민 여가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54.9%)이 '혼자서 하는 여가 활동'을 즐긴다고 답했습니다. 더 놀라운 건 IKEA의 2023년 'Life at Home' 보고서인데, 한국 응답자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14%)보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40%, 조사국 중 1위)을 훨씬 더 큰 즐거움으로 꼽았습니다.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우리.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욕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은 최윤석 박사의 칼럼 ‘고독의 재발견: 외롭지 않은 혼자를 만끽하기’를 통해 외로움이나 고립이 아닌, 건강한 ‘혼자’로 존재하기 위한 이해와 방법을 배워 가려 합니다. |
먼저, ‘고독’과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구분할 것
‘혼자' 있는 상태는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동반합니다. 예컨대 영어 단어 ‘Solitude’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고독’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는데, 이 단어 자체가 ‘외롭고 쓸쓸하다’는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또, ‘고독사’라는 표현은 우리 사회의 노인 빈곤 및 배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상태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심리학 연구들은 혼자 보내는 시간의 긍정적 면모를 조명하는데요. 에너지를 회복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자기 자신과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독(Solitude)을 외로움(Loneliness)이나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외로움(Loneliness): 사회적 관계나 상호작용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느끼는 부정적 정서
-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 사회적 연결 기회가 적거나 사회적 관계망이 얇은 상태
- 고독/혼자인 상태(Solitude):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거나 상호작용이 없는 상태.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자기 회복의 공간이 될 수 있음
핵심은 이들 개념이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혼자 있다’=‘외롭다’가 아니며, ‘고독’은 맥락과 태도에 따라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
고독의 쓸모에 대하여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외로움과 고립을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홀로 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택근무와 휴원·휴교로 2인 이상 가구의 구성원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고, 이는 가족 간 갈등 증가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시스템이 수행하던 돌봄의 역할이 각 가정에 떠맡겨지면서, 사회적 '단절'에 대한 우려와 달리 팬데믹은 어떤 이들에게는 과도한 '연결'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고독에 대한 욕구는 사회적 관계의 부담이 커질 때 함께 증가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에 2인 이상 가구 구성원들은 1인 가구에 비해 타인과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고, 이는 고독에 대한 더 강한 욕구로 나타났습니다. 또,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경우, 혼자 보낸 시간이 있던 날이 부정적 감정도 덜하고, 몸의 스트레스 반응도 훨씬 낮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혼자 있는 시간이 주는 '충전'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과 의무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은,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회복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죠. |
‘혼자’와 ‘같이’의 상생 관계
혼자 보내는 시간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는 현상은 좋은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 마음속에 ‘외로움’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질문은 ‘혼자’인 상태가 타인과 ‘같이’ 있는 상태와 대비되어 보여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혼자’와 ‘같이’ 두 상태가 반드시 대치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관계에서 충족될 수 있는 소속감(Belonging)과 혼자 있는 상태에서 충족될 수 있는 자율성(Autonomy)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욕구들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혼자 보내는 시간의 질과 사회적 관계의 질이 종종 긍정적인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즉,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만족스러운 혼자인 상태를 경험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만족스러울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60세 이상의 노인과 그들의 가까운 사회적 관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살펴보면,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만족스러운 혼자의 시간을 보냈을 때 다른 이의 정서적 웰빙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관계가 보고됐습니다. 즉, 혼자 있는 시간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만족스럽고 충전되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
건강한 ‘혼자’ 만들기
1.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기 혼자 있는 시간이 강제된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한 고독'일 때 효과가 큽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연구를 살펴 보면, 같은 혼자 있는 시간이라도 스스로가 선택해서 가진 시간은 웰빙을 높였지만, 어쩔 수 없이 격리된 시간은 외로움으로 이어졌습니다.
2. 관계의 질을 다지기 혼자 있는 시간의 질은 우리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맺고 있다면 혼자 있는 시간이 덜 외롭고, 재충전한 후 다시 관계 속으로 돌아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3.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글쓰기, 명상, 자연 속 걷기 같은 활동을 통해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이는 자율성과 창의성, 회복력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4. 과도한 연결에서 잠시 벗어나기 퇴근 후에도 끊이지 않는 업무 메시지, 주말마다 찾아오는 경조사, 은퇴 후에도 이어지는 황혼 육아.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연결과 그에 따른 숙제들로 가득합니다. 때로는 이 나사를 잠시 풀어두고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회복된 자율성이 다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5. '나'와 '우리'의 균형 감각 기르기 개인과 공동체를 대립시키지 않고 상생하는 방향을 계속해서 모색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조화시키는 길입니다. |
‘외로움’은 때로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한 ‘애씀’ 같기도 합니다.
2025년 브로드웨이에서 토니상 6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작가 박천휴는 ‘저는 외로움에 천착하는 사람이다. 작가로서 그것에 공감하고 위로가 되는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스물다섯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광고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그곳에서 늘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깊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늘 낯선 공간에서 낯선 언어를 사용하면서, 카페 한켠에 앉아 한국어로 대본을 쓰는 외국인 이민자로서의 외로운 삶이 그의 창작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시선을 두지 않는 외로운 곳에서 이야기를 찾아냈고, 그 안엔 작가 자신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미래의 서울, 수명이 다해 폐기를 앞둔 두 헬퍼봇이 만나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발견하는 이야기'가 바로, 〈어쩌면 해피엔딩〉입니다. |
‘뮤지컬을 만든다는 건 작가로서 아주 긴 시간 동안 혼자 외롭게 종이 위에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그가 선택한 '혼자 있음'은 자기 연민이 아닌 창조의 에너지였고, 그로부터 태어난 이야기는 관객과의 깊은 공감을 낳았습니다. 작가는, '스스로 외롭거나 슬플 때가 많은데, 작가로서 테크닉을 발전시켜서 슬픈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외로움은 때로 '창작의 언어'가 되기도 하고, '사유의 공간'이 되기도,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가 세상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애씀'이 되기도 합니다.
‘외로움’이 ‘사랑’으로 피어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대표 넘버, <사랑이란 When You're In Love>를 공유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
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재단법인 止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7길 32 SK관훈빌딩 11층 수신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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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은행잎에 노란물도 채 덜 들었는데. 아직 곳곳에 가을색 옷 환복을 덜 마친 단풍나무도 수두룩한데. 계절력은 어느새 입동(立冬, 11월 7일)에 접어들고, 입동보다도 서둘러 겨울 추위가 열 걸음 더 일찍 찾아왔네요. 며칠 전부터 아침에 들이마시는 공기는 영락없이 겨울의 것입니다. 코끝이 매운 손에 꼬집힌 듯 시립니다.
겨울을 좋아하시나요? 독자님께 겨울은, 어떤 의미로 저장되어 있나요? 저는 괜스레, 한 시절 꼭 껴안고 있던 것을 고스란히 훌훌 떠나보내는 나무와 꽃들의 모습에, 두터운 옷가지들에 몸을 푹 숨기고 어깨까지 말아서 움츠러든 거리 위 사람들 풍경에 그리고, 이 계절 동안은 깨우지 말라는 듯 꽁꽁 얼어붙어 긴 잠이 든 대지의 얼굴에서 ‘이별, 무상함, 외로움’ 같은 것이 여민 가슴 품속으로 짙어져 옵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서점, 카페,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이 양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고, 벌써부터 첫눈을 기대하는 설렘이 가슴안을 두드립니다.
겨울을 몇 걸음 앞둔 지금, 올해 나의 겨울은 ‘어떤 의미’로 다시 써 내려가면 좋을지. 잠시 작가가 되어 나의 이번 겨울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요.
현시대의 '외로움'은 '유행병'이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앓고 있는 아주 흔한 정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도로 산업화된 삶, 대도시로 몰려드는 인구,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은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외로움’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청년부터 노인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외로움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서울특별시가 '외로움 없는 서울' 정책을 발표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한 전담 콜센터 '외로움안녕120'을 운영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동시에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년 국민 여가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54.9%)이 '혼자서 하는 여가 활동'을 즐긴다고 답했습니다. 더 놀라운 건 IKEA의 2023년 'Life at Home' 보고서인데, 한국 응답자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14%)보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40%, 조사국 중 1위)을 훨씬 더 큰 즐거움으로 꼽았습니다.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우리.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욕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은 최윤석 박사의 칼럼 ‘고독의 재발견: 외롭지 않은 혼자를 만끽하기’를 통해 외로움이나 고립이 아닌, 건강한 ‘혼자’로 존재하기 위한 이해와 방법을 배워 가려 합니다.
먼저, ‘고독’과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구분할 것
‘혼자' 있는 상태는 흔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동반합니다. 예컨대 영어 단어 ‘Solitude’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고독’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는데, 이 단어 자체가 ‘외롭고 쓸쓸하다’는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또, ‘고독사’라는 표현은 우리 사회의 노인 빈곤 및 배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상태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심리학 연구들은 혼자 보내는 시간의 긍정적 면모를 조명하는데요. 에너지를 회복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자기 자신과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독(Solitude)을 외로움(Loneliness)이나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핵심은 이들 개념이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혼자 있다’=‘외롭다’가 아니며, ‘고독’은 맥락과 태도에 따라 긍정적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고독의 쓸모에 대하여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외로움과 고립을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홀로 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택근무와 휴원·휴교로 2인 이상 가구의 구성원들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고, 이는 가족 간 갈등 증가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시스템이 수행하던 돌봄의 역할이 각 가정에 떠맡겨지면서, 사회적 '단절'에 대한 우려와 달리 팬데믹은 어떤 이들에게는 과도한 '연결'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고독에 대한 욕구는 사회적 관계의 부담이 커질 때 함께 증가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에 2인 이상 가구 구성원들은 1인 가구에 비해 타인과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고, 이는 고독에 대한 더 강한 욕구로 나타났습니다. 또,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경우, 혼자 보낸 시간이 있던 날이 부정적 감정도 덜하고, 몸의 스트레스 반응도 훨씬 낮았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혼자 있는 시간이 주는 '충전'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과 의무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은,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회복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죠.
‘혼자’와 ‘같이’의 상생 관계
혼자 보내는 시간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는 현상은 좋은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 마음속에 ‘외로움’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질문은 ‘혼자’인 상태가 타인과 ‘같이’ 있는 상태와 대비되어 보여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혼자’와 ‘같이’ 두 상태가 반드시 대치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관계에서 충족될 수 있는 소속감(Belonging)과 혼자 있는 상태에서 충족될 수 있는 자율성(Autonomy)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욕구들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혼자 보내는 시간의 질과 사회적 관계의 질이 종종 긍정적인 상관관계를 보입니다. 즉,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만족스러운 혼자인 상태를 경험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만족스러울수록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60세 이상의 노인과 그들의 가까운 사회적 관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살펴보면,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만족스러운 혼자의 시간을 보냈을 때 다른 이의 정서적 웰빙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관계가 보고됐습니다. 즉, 혼자 있는 시간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만족스럽고 충전되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건강한 ‘혼자’ 만들기
1.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기 혼자 있는 시간이 강제된 것이 아닌 '내가 선택한 고독'일 때 효과가 큽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연구를 살펴 보면, 같은 혼자 있는 시간이라도 스스로가 선택해서 가진 시간은 웰빙을 높였지만, 어쩔 수 없이 격리된 시간은 외로움으로 이어졌습니다.
2. 관계의 질을 다지기 혼자 있는 시간의 질은 우리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애착 관계를 맺고 있다면 혼자 있는 시간이 덜 외롭고, 재충전한 후 다시 관계 속으로 돌아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3.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글쓰기, 명상, 자연 속 걷기 같은 활동을 통해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이는 자율성과 창의성, 회복력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4. 과도한 연결에서 잠시 벗어나기 퇴근 후에도 끊이지 않는 업무 메시지, 주말마다 찾아오는 경조사, 은퇴 후에도 이어지는 황혼 육아.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연결과 그에 따른 숙제들로 가득합니다. 때로는 이 나사를 잠시 풀어두고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회복된 자율성이 다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5. '나'와 '우리'의 균형 감각 기르기 개인과 공동체를 대립시키지 않고 상생하는 방향을 계속해서 모색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조화시키는 길입니다.
‘외로움’은 때로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한
‘애씀’ 같기도 합니다.
2025년 브로드웨이에서 토니상 6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작가 박천휴는 ‘저는 외로움에 천착하는 사람이다. 작가로서 그것에 공감하고 위로가 되는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스물다섯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광고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그곳에서 늘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깊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늘 낯선 공간에서 낯선 언어를 사용하면서, 카페 한켠에 앉아 한국어로 대본을 쓰는 외국인 이민자로서의 외로운 삶이 그의 창작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시선을 두지 않는 외로운 곳에서 이야기를 찾아냈고, 그 안엔 작가 자신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미래의 서울, 수명이 다해 폐기를 앞둔 두 헬퍼봇이 만나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발견하는 이야기'가 바로, 〈어쩌면 해피엔딩〉입니다.
정문성 & 전미도 - 사랑이란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 OST)
‘뮤지컬을 만든다는 건 작가로서 아주 긴 시간 동안 혼자 외롭게 종이 위에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그가 선택한 '혼자 있음'은 자기 연민이 아닌 창조의 에너지였고, 그로부터 태어난 이야기는 관객과의 깊은 공감을 낳았습니다. 작가는, '스스로 외롭거나 슬플 때가 많은데, 작가로서 테크닉을 발전시켜서 슬픈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외로움은 때로 '창작의 언어'가 되기도 하고, '사유의 공간'이 되기도,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가 세상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애씀'이 되기도 합니다.
‘외로움’이 ‘사랑’으로 피어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대표 넘버, <사랑이란 When You're In Love>를 공유드리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