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기 소나타, <템페스트>, <발트슈타인>, <열정>
베토벤 중기 소나타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17번 <템페스트>, 21번 <발트슈타인>, 23번 <열정> 소나타를 들 수 있다. 이 세 작품은 베토벤 소나타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렸을 뿐 아니라, 고전주의 피아노 소나타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음악양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드라마틱한 소나타시기로 일컫는 1802년에서 1808년에 등장한 소나타 중 첫 걸작 소나타 <템페스트>를 작곡하면서 실제로 베토벤은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801~2년에 베토벤은 세 소나타 16,17,18번(Op.31)을 작곡했다. 16번과 18번의 유쾌하고 밝은 특성은 어둡고 극적인 성격을 갖는 17번과 짙은 대비를 이룬다. 16번의 경쾌함은 1악장에서 명징하게 드러나고 사랑스러움과 앙증맞음은 2악장에서 구체적으로 발현한다. 2악장에서 선율은 스타카토와 긴 트릴을 주고받으며 마치 사랑에 빠진 남녀가 오페라 아리아 한 장면을 부르듯 유장하게 흘러간다. 반면 소나타 18번 1악장 도입부에서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부점 음표 동기가 특히 눈에 띈다. 독특하게도 2악장에 스케르초 형식이 들어가 방방 튀는 익살스러움이 톡톡 튕기는 스타카시모를 통해 극대화됐다. 나아가 18번이 <사냥>(Hunt) 소나타로 불리는 이유는 순전히 4악장의 긍정적인 역동성 때문이다. 생생하게 약동하며 움직이는 순환 음형이 등장해 독일 타란텔라 춤곡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사냥감을 쫒아가거나 사냥개에 쫒기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격렬한 움직임이 사냥을 연상시킨다.
태풍으로 번역되는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는 제목이 셰익스피어 마지막 작품 『템페스트』(The Tempest, 1611)에서 왔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 극 <한여름 밤의 꿈>이 보여주듯 요정과 마법이 어우러진 환상극이다. 왜 베토벤 소나타 17번이 <템페스트>라는 제목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베토벤 제자 쉰들러가 소나타 17번을 이해하는 열쇠를 달라고 하자 셰익스피어 작품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았고 쉰들러가 『템페스트』를 봤는지도 확실치 않다. 베토벤과 관련된 자료를 조작했고 그 어록의 진위를 의심받는 쉰들러에 대해 미심쩍은 눈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 작품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목이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유래했으니 음악과 극의 관계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그림 (작자미상)
일단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밀라노 공작이었으나 마법에 열중하다 동생 안토니오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죽음에 몰렸다. 구사일생으로 외딴 섬에 이르러 마법사 노릇을 하며 딸 미란다와 함께 지냈다. 어느 날 자신을 내친 일행이 섬 근처에 오는 걸 알고 복수를 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마법을 사용해 발생한 태풍으로 배는 난파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간신히 섬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폴리 왕자와 딸이 사랑에 빠졌고, 프로스페로도 결국 복수를 거두고 모두를 용서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관용과 감사의 마음으로 마법도구를 버리는 프로스페로의 모습에서 붓을 꺾고 여생을 보내려는 셰익스피어 말년의 모습과 겹친다.
그러나 서사적 흐름에 따라 극과 음악을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물론 베토벤 <템페스트> 1악장 도입부의 속도 변화가 지극히 이례적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매우 느린 라르고에서 급박한 알레그로로 진행해 아다지오로 마무리되는 극적 변화가 불과 6마디에서 발생한다. 더욱이 아주 여린 피아니시모에서 짧은 시간에 음을 증폭해 강력한 힘으로 마무리하고 소멸하는 변화도 놀랍다. 초반에 태풍이 몰아치는 셰익스피어 극과 이 지점에서 연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온유하면서도 강단 있는 2악장을 배제한 1악장과 3악장은 d단조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휘몰아치는 에너지가 넘친다. 오히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태풍을 일으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극적 구성은 조용히 흘러간다. 한마디로 베토벤 <템페스트>가 극히 일부 지점에서 폭풍 속의 고요를 갖고 있다고 하면, 셰익스피어 『템페스트』는 대조적으로 온건한 평온 속에서 몇 번 태풍이 불었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이 암시하는 극과 음악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베토벤, 템페스트 1악장 도입부
여기서 베토벤이 <템페스트>를 작곡한 시점이 1802년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802년은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한 해다. 이때는 음악가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청력상실로 절망에 빠졌고 동생 칼과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시기와도 겹친다. 자살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상태를 딛고 다시금 분연히 예술혼을 불태운 직후 나온 곡이 바로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였다. 다시 말해서 프로스페로가 용서를 통해 분노와 복수를 버렸듯이 베토벤도 가족과 병으로 인한 고통을 승화시켜 보다 높은 선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템페스트』와 베토벤 <템페스트>는 인생을 바라보는 내면의 심리 묘사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곡은 태풍처럼 몰아쳤던 혼돈과 어두움을 떨치고 베토벤이 스스로 자신에게 헌정한 첫 곡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베토벤은 걸작을 세상에 내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숨고르기를 한 후 다음 걸작을 향해갔다. 일례로 베토벤 소나타 19~20번(op.49)은 선율은 아름답지만 상대적으로 짧고 단순하다. 악장구성도 2악장에 불과하다. 초판 제목이 <두 개의 쉬운 소나타>로 베토벤이 의도적으로 간결하게 만든 소나타임을 알 수 있다. 소나타 22번(op.54) 역시 2악장 구성으로 음악적 내용이 평범하다. 반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23번 <열정> 소나타는 장대한 규모나 악상의 풍부함으로 명실상부 베토벤 소나타를 대표한다.
우선 21번(op.53) <발트슈타인>(Waldstein)은 베토벤 음악 애호가이자 후원자였던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됐다. 발트슈타인 백작(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은 본 시절부터 베토벤의 진가를 알아봤다. 베토벤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성장하기 위해 본에서 빈으로 떠날 때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의 손으로 받아들이라고 미래의 위대한 작곡가에게 큰 축복을 내린 장본인이다. 음악적으로도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출판 제목이 <대 소나타>로 적혀있어 의도적으로 이전과 다른 차원의 깊이를 갖고 창작했음을 알 수 있다. 1악장에서 8분음표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제1주제와 여유있고 서정적인 제2주제가 대비를 이루며 발전해나가는 양상은 마치 혈기 넘치는 춤꾼들이 모여 힘이 넘치는 유연한 군무를 펼치는 것 같다. 나아가 28마디에 불과해도 2악장은 유장하게 흐르고 화려한 선율이 만개하는 3악장에서의 화음 울림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론도가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3악장이다. 유려한 소리가 예리하게 들리는 것은 화성의 연속적인 모자이크 감각을 관통하는 트릴과 선율의 명쾌함에서 기인한다.

▲ (좌)발트슈타인 백작 | (우)발트슈타인의 축복 편지
또 다른 베토벤 걸작 피아노 소나타 23번(op.57)은 1805년 베토벤이 오페라 피델리오 작업을 거의 마무리할 즈음 완성됐다. 폭풍처럼 열정이 다가온다고 함부르크의 출판업자가 열정이라고 붙인 뒤로 <열정> 소나타(Appassionata Sonata)로 알려져 있다. 제목에 걸맞게 실제 음악도 냉정과 열정을 넘나든다. 악장으로도 냉정과 열정이라는 상대적 구분이 가능한데, 1악장은 냉정과 열정이 섞여있으며 2악장은 냉정, 3악정은 열정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악장은 f단조에 기초해 베토벤 <운명> 교향곡 5번 1악장에 등장하는 따따따 단이라는 셋잇단음표 운명의 동기가 간간히 긴장감을 부여한다. 가장 단순한 동기음형은 위로 구르고 아래로 구르고 하면서 장대한 파노라마를 펼친다. 반면 2악장은 변주곡형식 위에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깔끔하고 간결하게 주제를 변주한다. 마침내 3악장에 이르러 열정은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통상적인 론도가 아닌 소나타형식이라는 형식미 위에 매우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내달리는 피날레를 듣고 있으면 진정 이 곡이 열정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불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 베토벤 열정 소나타 1악장 도입부

▲ 열정 소나타 악보가 그려진 러시아 우표
이렇듯 베토벤은 삶과 음악이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에 <템페스트>, <발트슈타인>, <열정> 소나타를 쏟아냈다. 베토벤 전 생애 중 가장 창작력이 왕성했던 시절에 나온 걸작이자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새로운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해 나간 한 위대한 작곡가의 탁월한 결과물이었다.

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
- 중기 소나타, <템페스트>, <발트슈타인>, <열정>
베토벤 중기 소나타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17번 <템페스트>, 21번 <발트슈타인>, 23번 <열정> 소나타를 들 수 있다. 이 세 작품은 베토벤 소나타를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렸을 뿐 아니라, 고전주의 피아노 소나타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음악양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드라마틱한 소나타시기로 일컫는 1802년에서 1808년에 등장한 소나타 중 첫 걸작 소나타 <템페스트>를 작곡하면서 실제로 베토벤은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801~2년에 베토벤은 세 소나타 16,17,18번(Op.31)을 작곡했다. 16번과 18번의 유쾌하고 밝은 특성은 어둡고 극적인 성격을 갖는 17번과 짙은 대비를 이룬다. 16번의 경쾌함은 1악장에서 명징하게 드러나고 사랑스러움과 앙증맞음은 2악장에서 구체적으로 발현한다. 2악장에서 선율은 스타카토와 긴 트릴을 주고받으며 마치 사랑에 빠진 남녀가 오페라 아리아 한 장면을 부르듯 유장하게 흘러간다. 반면 소나타 18번 1악장 도입부에서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부점 음표 동기가 특히 눈에 띈다. 독특하게도 2악장에 스케르초 형식이 들어가 방방 튀는 익살스러움이 톡톡 튕기는 스타카시모를 통해 극대화됐다. 나아가 18번이 <사냥>(Hunt) 소나타로 불리는 이유는 순전히 4악장의 긍정적인 역동성 때문이다. 생생하게 약동하며 움직이는 순환 음형이 등장해 독일 타란텔라 춤곡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사냥감을 쫒아가거나 사냥개에 쫒기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격렬한 움직임이 사냥을 연상시킨다.
태풍으로 번역되는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는 제목이 셰익스피어 마지막 작품 『템페스트』(The Tempest, 1611)에서 왔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 극 <한여름 밤의 꿈>이 보여주듯 요정과 마법이 어우러진 환상극이다. 왜 베토벤 소나타 17번이 <템페스트>라는 제목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베토벤 제자 쉰들러가 소나타 17번을 이해하는 열쇠를 달라고 하자 셰익스피어 작품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셰익스피어를 읽지 않았고 쉰들러가 『템페스트』를 봤는지도 확실치 않다. 베토벤과 관련된 자료를 조작했고 그 어록의 진위를 의심받는 쉰들러에 대해 미심쩍은 눈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두 작품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목이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유래했으니 음악과 극의 관계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그림 (작자미상)
일단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밀라노 공작이었으나 마법에 열중하다 동생 안토니오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죽음에 몰렸다. 구사일생으로 외딴 섬에 이르러 마법사 노릇을 하며 딸 미란다와 함께 지냈다. 어느 날 자신을 내친 일행이 섬 근처에 오는 걸 알고 복수를 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마법을 사용해 발생한 태풍으로 배는 난파됐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간신히 섬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폴리 왕자와 딸이 사랑에 빠졌고, 프로스페로도 결국 복수를 거두고 모두를 용서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관용과 감사의 마음으로 마법도구를 버리는 프로스페로의 모습에서 붓을 꺾고 여생을 보내려는 셰익스피어 말년의 모습과 겹친다.
그러나 서사적 흐름에 따라 극과 음악을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물론 베토벤 <템페스트> 1악장 도입부의 속도 변화가 지극히 이례적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매우 느린 라르고에서 급박한 알레그로로 진행해 아다지오로 마무리되는 극적 변화가 불과 6마디에서 발생한다. 더욱이 아주 여린 피아니시모에서 짧은 시간에 음을 증폭해 강력한 힘으로 마무리하고 소멸하는 변화도 놀랍다. 초반에 태풍이 몰아치는 셰익스피어 극과 이 지점에서 연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온유하면서도 강단 있는 2악장을 배제한 1악장과 3악장은 d단조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휘몰아치는 에너지가 넘친다. 오히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태풍을 일으키는 경우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극적 구성은 조용히 흘러간다. 한마디로 베토벤 <템페스트>가 극히 일부 지점에서 폭풍 속의 고요를 갖고 있다고 하면, 셰익스피어 『템페스트』는 대조적으로 온건한 평온 속에서 몇 번 태풍이 불었다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이 암시하는 극과 음악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베토벤, 템페스트 1악장 도입부
여기서 베토벤이 <템페스트>를 작곡한 시점이 1802년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802년은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한 해다. 이때는 음악가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청력상실로 절망에 빠졌고 동생 칼과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시기와도 겹친다. 자살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상태를 딛고 다시금 분연히 예술혼을 불태운 직후 나온 곡이 바로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였다. 다시 말해서 프로스페로가 용서를 통해 분노와 복수를 버렸듯이 베토벤도 가족과 병으로 인한 고통을 승화시켜 보다 높은 선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템페스트』와 베토벤 <템페스트>는 인생을 바라보는 내면의 심리 묘사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곡은 태풍처럼 몰아쳤던 혼돈과 어두움을 떨치고 베토벤이 스스로 자신에게 헌정한 첫 곡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베토벤은 걸작을 세상에 내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 숨고르기를 한 후 다음 걸작을 향해갔다. 일례로 베토벤 소나타 19~20번(op.49)은 선율은 아름답지만 상대적으로 짧고 단순하다. 악장구성도 2악장에 불과하다. 초판 제목이 <두 개의 쉬운 소나타>로 베토벤이 의도적으로 간결하게 만든 소나타임을 알 수 있다. 소나타 22번(op.54) 역시 2악장 구성으로 음악적 내용이 평범하다. 반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23번 <열정> 소나타는 장대한 규모나 악상의 풍부함으로 명실상부 베토벤 소나타를 대표한다.
우선 21번(op.53) <발트슈타인>(Waldstein)은 베토벤 음악 애호가이자 후원자였던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됐다. 발트슈타인 백작(Ferdinand von Waldstein 1762~1823)은 본 시절부터 베토벤의 진가를 알아봤다. 베토벤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성장하기 위해 본에서 빈으로 떠날 때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의 손으로 받아들이라고 미래의 위대한 작곡가에게 큰 축복을 내린 장본인이다. 음악적으로도 <발트슈타인> 소나타는 출판 제목이 <대 소나타>로 적혀있어 의도적으로 이전과 다른 차원의 깊이를 갖고 창작했음을 알 수 있다. 1악장에서 8분음표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제1주제와 여유있고 서정적인 제2주제가 대비를 이루며 발전해나가는 양상은 마치 혈기 넘치는 춤꾼들이 모여 힘이 넘치는 유연한 군무를 펼치는 것 같다. 나아가 28마디에 불과해도 2악장은 유장하게 흐르고 화려한 선율이 만개하는 3악장에서의 화음 울림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론도가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3악장이다. 유려한 소리가 예리하게 들리는 것은 화성의 연속적인 모자이크 감각을 관통하는 트릴과 선율의 명쾌함에서 기인한다.
▲ (좌)발트슈타인 백작 | (우)발트슈타인의 축복 편지
또 다른 베토벤 걸작 피아노 소나타 23번(op.57)은 1805년 베토벤이 오페라 피델리오 작업을 거의 마무리할 즈음 완성됐다. 폭풍처럼 열정이 다가온다고 함부르크의 출판업자가 열정이라고 붙인 뒤로 <열정> 소나타(Appassionata Sonata)로 알려져 있다. 제목에 걸맞게 실제 음악도 냉정과 열정을 넘나든다. 악장으로도 냉정과 열정이라는 상대적 구분이 가능한데, 1악장은 냉정과 열정이 섞여있으며 2악장은 냉정, 3악정은 열정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악장은 f단조에 기초해 베토벤 <운명> 교향곡 5번 1악장에 등장하는 따따따 단이라는 셋잇단음표 운명의 동기가 간간히 긴장감을 부여한다. 가장 단순한 동기음형은 위로 구르고 아래로 구르고 하면서 장대한 파노라마를 펼친다. 반면 2악장은 변주곡형식 위에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깔끔하고 간결하게 주제를 변주한다. 마침내 3악장에 이르러 열정은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통상적인 론도가 아닌 소나타형식이라는 형식미 위에 매우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내달리는 피날레를 듣고 있으면 진정 이 곡이 열정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불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 베토벤 열정 소나타 1악장 도입부
▲ 열정 소나타 악보가 그려진 러시아 우표
이렇듯 베토벤은 삶과 음악이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에 <템페스트>, <발트슈타인>, <열정> 소나타를 쏟아냈다. 베토벤 전 생애 중 가장 창작력이 왕성했던 시절에 나온 걸작이자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새로운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해 나간 한 위대한 작곡가의 탁월한 결과물이었다.
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