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각 분야 명사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주제의 인문이야기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지혜의 깊이를 더하시길 바랍니다.

예술[클래식] VIII.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 (오지희)

2021-10-22

- 초기 소나타, <비창>과 <월광>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개는 그 어떤 장르보다 베토벤이 어떻게 음악을 작곡해나갔는지 실제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거대한 설계도다. 19세기 대표적인 지휘자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94)가 베토벤 소나타를 신약성서에 비유한 것은 기존의 소나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소나타를 세운 것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각각의 동기와 악구, 주제 발전 등 단 한 음도 그 자리에 없어서는 성립되지 않는 음악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소나타(sonata)는 바로크시기에 악기가 울린다는 단어 소나레(sonare)에서 유래해 성악이 아닌 기악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뜻했다. 독주 소나타가 주로 많았지만 합주 소나타, 트리오 소나타 등 여러 악기를 조합해 다양하게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기악 장르였다. 통상 3-4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소나타 1악장에는 소나타 형식이 사용되고, 2악장은 느린 악장, 3악장은 미뉴에트나 스케르초 형식, 4악장은 론도형식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악장은 서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매번 다른 음악을 담는 독자적인 틀 역할을 한다. 베토벤은 전통적인 틀을 바꾸는 실험을 시도하기도 하고 정해진 규칙을 깨기도 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만들어나갔다. 베토벤 소나타가 드러내는 다양한 특성은 베토벤이 슈만처럼 특정 시기에 특정 장르만 집중적으로 작곡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오히려 전 생애에 걸쳐 한 장르를 깊이있게 파고들어 초기 중기 후기의 발전된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뒤로 갈수록 전반적으로 음악이 복잡해지고 심오해졌지만 기계적으로 시대순의 발전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초기부터 베토벤 특유의 치밀한 구성과 개성은 명백히 드러났고 세련된 음악과 정교한 진행은 중기 때 폭발적으로 분출했기 때문이다.

본에서 빈으로 왔을 때 베토벤은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나타 작곡에 처음부터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것은 당연했다. 첫 번째 피아노 소나타는 1793~95년에 나왔다. 베토벤은 첫 소나타 1~3번(op.2)을 존경하는 대선배 작곡가 하이든에게 헌정했다. 하이든이 영국에 갔다 오는 길에 본에 들려 베토벤과 처음 만났을 때가 베토벤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베토벤은 하이든 앞에서 자신의 첫 소나타를 들려준 것이다. 아무리 초기 소나타라고 해도 베토벤 작품은 하이든을 비롯한 동시대 음악가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흔히 젊은 나이에 내놓는 곡들은 아직 실력이 무르익지 않아 유치하거나 엉성할 수 있는데, 베토벤은 첫 소나타부터 대범하고 강렬했다. 뛰어난 연주 솜씨 못지않은 범상치 않은 작곡 실력이었다. 나아가 청년 베토벤의 풋풋함을 느낄 수 있는 피아노 소나타 2번에서 3악장에 미뉴에트 대신 스케르초를 도입해 형식의 변화를 꾀했다. 3번에서는 혈기 넘치는 피아니스트의 힘찬 기개가 작품 전체에 가득하다. 이와 같이 첫 소나타 1~3번의 도전을 통해 피아노 소나타 작곡에 자신감을 얻은 베토벤은 1796년 경 이전과는 감정의 폭이 더 깊고 스케일이 커진 소나타 4번(op.7)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어 1795~98년에 작곡된 세 소나타 5~7번(op.10)에서 5번과 6번은 3악장 구조라 미뉴에트나 스케르초 악장이 없다. 반면 7번은 세 곡 중 가장 진보적인 음악적 색깔을 지니고 다시 전통적인 4악장 구조로 회귀했다. 이렇듯 베토벤은 이미 초기 소나타에서부터 악장 형식에 변화를 주고 틀을 조율하며 자신만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작곡시기가 1798년경으로 추정되는 8번(op.13) <비창> 소나타는 여러모로 이전과 확연히 구별되는 베토벤 초기 소나타 최초의 걸작으로 꼽힌다. 우선 <비창>(Pathetique)이라는 제목 자체가 베토벤이 처음으로 피아노 소나타에 붙인 것이었다. 원 제목이 대 비창 소나타로 해석할 수 있는 로 구매자의 흥미를 충분히 끄는 제목이었기에 작곡가 베토벤뿐 아니라 출판업자에게도 유효한 판매전략으로 작용했다. 현재까지도 제목이 주는 아우라는 엄청나다. <비창> 소나타의 범상치 않은 기운은 1악장 도입부에서부터 거침없이 풍긴다. 통상 1악장을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났으며, 느린 c단조에 기초해 장중하면서도 강렬하게 비장한 느낌을 토로하다가 매우 급박하게 알레그로 빠른 악장으로 회귀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애상감이 가득하면서도 열정적인 놀라운 1악장을 지나 2악장에 이르면, 그 우아하고 기품있는 선율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가 없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의 비장미가 잔잔한 2악장에서 오히려 꽃을 핀다. 그 선율의 아름다움에 반해 현재도 재즈나 팝송으로 새롭게 각색되기도 한다. 론도형식의 3악장은 1악장의 동기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음악적으로 1악장과 3악장이 탄탄한 구조로 연결돼 있다. <비창> 소나타 8번은 베토벤 초기의 음악적 역량이 축약됨과 동시에 미래에 폭발적으로 펼쳐질 작곡가의 발전 가능성을 선보인 소나타였다.

20191230_2_ojh.jpg

▲ 비창 소나타 2악장 도입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9~10번(op.14)은 3악장 구조로 <비창> 소나타와 비슷한 시기에 작곡됐지만 <비창> 소나타에 비해 음악구성이 상대적으로 평범하다. 반면 1800년에 나온 11번(op.22)은 베토벤 스스로 대 소나타로 명명했을 정도로 미뉴에트가 들어간 전통적인 4악장 구조 위에 생동감과 낭만성이 가득하다. 또한 12번(op.26)은 1악장이 테마와 변주로 구성된 변주곡형식이고 오히려 3악장 장송행진곡이 소나타의 중심으로 등장한다. 이 3악장은 3년 뒤 나온 <영웅> 교향곡에 삽입된 장송행진곡보다는 약하지만 장송행진곡 장르의 앞 선 버전으로 간주된다. 소나타 11~12번은 여러 악장을 통해 형식과 내용을 다양하게 시도한 베토벤의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소나타이다.

이것저것 틀을 바꿔가며 실험을 해 본 베토벤도 이제 30세를 넘어 음악적 기량이 무르익자 내용에서의 독창성과 완숙미를 점점 추구하기 시작했다. 13~14번(op.27)은 첫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를 작곡할 무렵 등장했고 공통적으로 환상곡풍 소나타(Sonata quasi una fantasia)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제목이 시사하듯 13번은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지 않은 즉흥성이 강한 작품이며, 14번이 그 유명한 <월광> 소나타다. <월광> 소나타(Moonlight Sonata)가 오늘날 널리 사랑받고 향유되는 것은 3악장의 당당한 기풍과 탁월한 표현력도 큰 역할을 하지만, 단연코 명상적이고 환상적인 1악장 덕분이다.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실험정신을 발휘한 것은 초창기부터 이미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광> 소나타 1악장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는 가히 독보적이다. <월광>이라는 제목은 베토벤이 붙이지 않았다. 시인 렐슈타프가 1악장을 듣고 호수에 비친 달빛이 마치 흔들리는 조각배 같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사실 누가 제목을 붙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셋잇단음표로 움직이는 1악장의 분위기가 제목과 너무나 완벽히 일치한다는 데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하는 2악장을 거쳐 월광 소나타의 힘은 3악장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한다.

20191230_1_ojh.jpg

▲ 월광 소나타 1악장 도입부


베토벤은 <비창>과 <월광>과 같은 독창적인 작품을 연속해서 생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걸작이 등장하고 난 후에는 평범한 곡이 나왔다. <월광> 소나타와 같은 해 작곡된 소나타 15번(op.28)은 감정이 절제된 온화한 성격으로 <전원> 소나타(Sonate Pastorale)로 불린다. 소나타 16번(op.31)은 명쾌하지만 이전의 <비창>과 <월광>에 비해 열정과 창작능력은 오히려 두드러지지 않는다. 따라서 베토벤이 다양한 실험정신으로 소나타 장르를 활용해 부단한 노력을 가한 후 비로소 창작력이 응집된 걸작 <비창>과 <월광> 소나타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_20181203103237.jpg

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