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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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MINDLAB] 환호환탄환사 幻虎還呑幻師: 호랑이에 잡아먹힌 마법사 (조성택 교수)

2025-03-25
환호환탄환사 幻虎還呑幻師: 호랑이에 잡아먹힌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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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그리고 기억

 

상처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일이다. 그래서 아프고, 치유가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도 있다. 마음의 상처다. 마음의 상처는 기억으로 저장된다. 기억된 상처는 쉽게 아물지도 않고, 아문 듯해도 때가 되면 새살 돋듯 생생한 아픔으로 돋아난다. 기억은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과거를 현재로 소환할 수 있다.

 

기억과 아픔의 문제에 대해 에크하르트 툴레는 말한다.

 

인간은 오래된 기억을 지속시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오래된 감정적 고통의 축적물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것을 ‘고통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그 고통체에

새로운 고통을 추가하는 것은 멈출 수 있다.

 

-에크하르트 툴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류시화 역, 189쪽

 

기억은 인간에게 축복이자 저주다. 살면서 경험한 기쁨과 고통의 저장소다. 기억은 힘들 때 위안과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를 ‘지금 여기’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고 그래서 고통의 진원지가 되기도 한다. 툴레는 그것을 ‘고통체’라고 하였고 불교 전통에서는 이를 업業 혹은 업장(業障, 업으로 인한 장애)이라고 한다. 여기엔 우리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일 심지어 엄마의 뱃속에서 겪었던 경험도 저장되어, 언제 든 현재의 ‘상처’로 되살아날 태세로 우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고통의 진원지는 기억이며, 기억을 여기로 소환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흔히 ‘상처받았다’고 하여 상처를 받게 된 상황이나 가해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대부분 경우 상처는 누가 준 것이라기보다 내 안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된 것이다. 어떤 상황이나 가해자가 일종의 ‘조연’의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주연은 결국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 나 자신이다. 현재로 소환된 과거의 기억은 그 자체로 상처이면서 또 다른 새로운 고통의 기억을 형성한다. 과거의 고통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새로운 고통을 추가하는 일은 멈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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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에 잡아먹힌 마법사

 

우리의 ‘생각’에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다. 생각은 과거, 현재, 미래를 종횡무진하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할 수 있다. 생각은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 재잘거린다. 우리는 그 재잘거림을 내면의 목소리로 여기고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믿는다. 어떤 상황이 과거의 부정적 기억과 결합되면 한 편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생각’이라는 단어와 ‘사로잡히다’라는 동사는 자동 완성형 구절이다.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믿지만 정작 ‘생각’에 사로잡히는 포로는 나 자신이다.

 

불교 전통에 ‘환호환탄환사 幻虎還呑幻師’라는 이야기가 있다. 마술로 만들어 낸 호랑이에 잡아먹힌 마술사 이야기다. 괴담이 아니다. ‘생각’이 실화가 되어 나를 사로잡아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우리 일상의 이야기다.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은 호랑이만이 아니다. 호랑이와 함께 ‘겁먹은 나’도 만들어진다. 서로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호랑이 없이는 ‘겁먹은 나’도 없고 ‘겁먹은 나’가 없다면 호랑이도 없다. ‘환호환탄환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잃어버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또 다른 예화가 ‘새끼줄과 뱀’ 이야기다. 길을 가다 새끼줄을 ‘뱀’으로 알고 ‘깜짝 놀라는 나’는 호랑이에 ‘겁먹은 나’와 다르지 않다.

 

생각이라는 가상현실의 재료가 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나 두려움만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 또한 가상현실의 재료가 된다. 인도철학 전통에서 자주 등장하는, 은화 銀貨에 관한 예화가 있다. 길을 가던 중 저기 모래더미에서 반짝이는 은화를 발견했다. 기쁜 마음에 달려가 보니 은화가 아니라 조개껍데기였다는 이야기다. 조개껍데기를 은화로 만들어낸 것은 나의 욕망이다.

 

 

알아차림이 없는 생각

 

꿈속의 현실은 꿈을 깨면 사라진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가상이 가상인 줄 알면 환상은 사라진다. 그것을 ‘알아차림’ 혹 은 자각自覺이라고 한다. 그러나 알아차린다는 것이 ‘호랑이’, ‘뱀’, ‘은 화’ 등 가상현실의 실제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꿈속의 현실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응하여 무서워하고, 울고, 심지어 진땀을 흘리기도 하는 것처럼 가상현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실제로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는 가상현실의 실제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알아차린다는 것 혹은 자각한다는 것은 생각에 사로잡힌 나를 바라보고, 생각과 나 자신을 구별하는 일이다. 메타인지의 일종이다.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욕망과 내가 구별이 안 되는 상태로, 욕망이 좌절되는 것을 내가 부정되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흔히 분노조절 장애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분노의 레벨을 조정하는 어떤 정신적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분노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분노하는 나’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가 곧 분노조절 장애다.

 

에크하르트 툴레는 우리의 ‘고통체’에 새로운 고통을 추가하는 가해자는 바로 우리의 ‘무의식’이라고 한다. 툴레가 말하는 무의식이란 알아차림이 없는 생각을 말한다. 알아차림이 없는 생각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고통으로 되살아나게 한다. 고통과 불안이란,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될 때 일어나는 정서적 상태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기억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알아차린다면,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상처를 마주하고 고통을 직면하는 일이다. ‘상처받은 나’를 바라보고 ‘고통’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여 바라볼 때 비로소 ‘과거의 일’을 과거의 것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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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챙김과 명상

 

안타깝게도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을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다. 길을 걸으면서 프로젝트를 생각하고, 밥 먹으면서 스마트폰 보고, 심지어 대화 중에도 상대의 말이 아니라 다른 생각에 몰두할 때도 있다. ‘콩밭에 가 있는 마음’이란 말처럼 산만함이 우리 마음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오늘날 일상이 된 전자기기와 인터넷 통신망은 시공간의 물리적 거리감을 없애 버렸고 그 결과 인간의 생래적 산만함은 ‘멀티태스킹’이라는 말로 미화되거나, 일부 직업군에서는 일종의 ‘능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마음챙김과 명상이 핫한 사회적 트렌드로 떠오르는 것은 흥미롭고 한편으로 다행스럽기도 하다. 마음챙김은 말로 하자면 쉽다. “똥 눌 때는 똥만 누고, 밥 먹을 땐 밥만 먹어라”는 것이다.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그게 어디 쉬운가. 그 쉽지 않음을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의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생존을 위해 주변 경계를 늦출 수 없고 부단히 새로운 정보를 획득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습득된 산만함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산만함이 진화의 결과물이라면 이를 거슬러 오롯이 여기 현재에 집중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수긍이 간다.

 

마음챙김은 일종의 각성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먹을 때는 ‘먹는다는 사실’, 걸을 때는 ‘걷는다는 사실’, 생각할 때는 ‘생각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챙김은 집중이라기보다는 일어나는 생각들을 ‘바라보는 일’이다.

 

마음의 평온을 기대하면서 명상을 시작하지만 막상 발견하는 것은 부산스럽고 산만한 마음이다.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가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산만한지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 마음챙김은 일단 성공적이다. 마음챙김은 생각의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바라보는 일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과 ‘나’를 구별하는 일이며, 일어난 생각에 붙잡히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일이다. ‘호랑이’도, ‘뱀’도, ‘은화’도 그냥 흘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느 정도 평정심을 느낄 수 있다.

 

마음챙김이 순일해지면 이제 본격적인 명상의 단계가 시작된다. 명상은 의식이라는 바다의 심해를 경험하는 일이다. 마음챙김이 일어났다 부서 지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명상은 생멸하는 파도 아래, 깊은 바닷속을 체험하는 일이다. 다이버가 실력과 장비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바닷속 깊이가 다르듯이 명상을 통해 의식의 바다를 경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얕은 바다에서 열대어와 산호초를 볼 수도 있고 그야말로 심해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도달하는 깊이와 상관없이 명상은 우리에게 생멸하는 파도(생각) 아래 고요한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또한 명상은 파도가 바람을 조건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듯이, 생각 또 한 ‘과거’를 조건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마음챙김이 ‘호랑이’를 다만 흘려보냈다면, 명상은 ‘호랑이’가 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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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풍경을 바라보다

 

마음챙김과 명상은 결국 내 마음을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런데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일 또한 마음의 일인데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이 가능한가?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 스스로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을 자각自覺이라고 한다. 메타인지의 일종으로 자신의 생각을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 판단하는 정신작용이다. 롤LoL게임의 살아있는 레전드 페이커(Faker, 이상혁)가 시합 전 명상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페이커의 말이다.

 

 

“경기 전에 하는 명상은 제 머릿속에 생각들이 어떻게 떠오르는지

바라보는 느낌인 것 같고요, ... 저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큰 시합을 앞두고 누구나 그렇듯이 불안, 초조, 두려움이 생겨난다. 페이커는 그러한 정서적 상태와 자기 자신을 구별하고 분리한다. 지도안에서 지도 전체를 볼 수 없듯이 페이커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서 걸어 나와, 스스로 마음의 풍경을 바라본다. 마치 텅 빈 하늘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흘러가는 다양한 구름을 보듯 자신의 마음에서 빚어지는 온갖 풍경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저 구름들은 인연 조건에 따라 펼쳐지는 잠시의 풍경일 뿐, 본래 마음은 텅 빈 하늘임을 깨닫는다. ‘마음의 풍경’이 주는 선물은 ‘풍경’이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텅 빈 하늘’이다. 늘 거기에 있는 텅 빈 하늘의 존재, 그것을 알고 느낄 때 평정심은 저절로 찾아온다.

 

마음의 풍경을 바라보는 수단으로 마음챙김과 명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마음의 풍경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메타인지적 활동이 예술의 창작행위다. 특히 시 詩를 쓰는 것이 그러하다. 명상이 마음의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평정심을 선물해주듯 이 시인은 마음의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관조觀照의 미학이라 할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소월의 시 「가는 길」은 자신의 내면을 풍경처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흔히 이 시를 두고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쓸쓸하고 고독한 시인의 내면을 형상화한 시”라고 평가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진부한 해석이다. 「가는 길」의 시적 성취는 ‘바라보는’ 거리감에 있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프지만 슬픔에 빠지지 않는’ 거리감이다. 내면의 쓸쓸함을 ‘풍경’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이 글의 주제인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고 치유가 될 수 있다.

 

「가는 길」의 첫 연은 ‘생각’의 마법과도 같은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흔히 우리는 그리움이라는 감정 상태가 ‘그립다’는 생각을 일으킨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립다’는 생각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심리 과정에 대한 소월의 통찰은 놀랍다. 길을 가던 시인은 예기치 않은 계기로 기억 속의 옛 연인을 떠올리게 되고 그리움이라는 감정 상태에 휩싸이게 된다.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이 두 번째 연은 ‘그립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잃어버린 시인의 모습이다. 이제 옛 연인과의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되었고, 옛일에 사로 잡힌 시인은 ‘가던 길을 잃고’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다 느닷없이 까마귀가 등장하는 세 번째 연은 무척 흥미롭다.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까마귀’는 시인의 귀환을 알리는 훌륭한 시적 장치다. ‘까마귀 소리’는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다. ‘저 산’과 ‘들’에서 들리는 지금·여기의 소리다. ‘옛일’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인은 이제 지금 여기로 돌아왔다.

 

트라우마 치유에 명상이 사용될 때 가장 많이 강조하는 것이 청각에 대한 마음챙김과 방향감각이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피해자를 현재로 돌아오게 하고 자신이 현재에 있음을 가장 분명하게 자각하게 하는 수단이 바로 청각과 방향감각이기 때문이다. ‘까마귀 소리’와 함께 ‘저 산’, ‘들’ 그리고 ‘서산’이라는 방향감각은 시인이 기억의 저편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려주는 시적 장치다.

 

지금·여기로 복귀한 시인은 이제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풍경처럼 바라본다.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시인은 이제 ’기억’이라는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 그 기억의 강물을 다만 바라볼 뿐이다.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그냥 옛일로 남겨둔다. 기억을 풍경처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담담하다.

 

옛일을 과거로 남겨두는 시인의 담담한 시선처럼, 상처를 풍경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과거가 현재의 아픔으로 되살아나는 일은 멈출 것이다.


조성택

(전)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 사단법인 마인드랩 대표

고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UC 버클리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마인드랩에서 종교문해력의 연구와 교육, 실천적 지혜로서의 명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에 매진하고 있다.